지금에야 구닥다리 가요 취급을 받지만, 원래는 자유민권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민권가요가 기반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민중가요와도 같은 위치였던 것. 애초부터 엔카의 엔(演)도 연설할때의 연자와 같다. 1888년 히사다 오니이시(久田鬼石)가 엔카 장사단(엔카 소오시당 演歌壮士団)을 결성할 무렵부터 노래에 의한 연설이라는 의미에서 연가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장사가(소오시카 壮士歌)라고도 불리었다. 여기서 장사란 길거리나 소극장에서 신정부(삿쵸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들은 반정부적인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엔카 장사단의 가장 유명한 노래는 "다이너마이트 부시(ダイナマイト節)"였는데, 이 노래는 토사의 속요와 학교 창가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었고 이 노래를 모태로 유카이 부시(愉快節), 킴부 부시(欣舞節)등의 노래가 등장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선동적이고 과격한 가사가 주 내용인데, "민권론자의 눈물이 비처럼 흘러 단련해 낸 야마토 담력 / 국리민복 증진하고 민력을 보양하세 / 여의치 않다면 다이너마이트로 쾅!" 이거 테러리즘 이잖아
다이너마이트 부시. 심지어 "4천만 동포를 위해서라면 붉은 수의도 괴롭지 않네"같은 가사를 볼 수 있다.
이 이후 국회 개설이나 청일전쟁을 풍자한 가사가 히트했고, 공창제 폐지를 풍자한 "스트라이크 부시(ストライキ節)"도 크게 유행했다. 당시의 엔카사(演歌師)들은 거리에서 가사집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02년에 엔카장사단이 해체되고, 소에다 아젠보오(添田唖蝉坊)[1]가 스타로 떠오르면서 그의 "랏파 부시(ラッパ節)"가 1905년부터 크게 유행한다. 랏파 부시가 대 히트를 하자, 평소에 교류하고 있던 사카이 토시히코[2]의 의뢰를 받아 랏파부시를 개작하게 된다. 이 노래는 사회당(일본)의 당가(堂歌)인 "사회당 랏파부시"로 쓰이게 된다. 사회당 랏파부시는 이후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곡으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일본 사회주의 집회에 가면 할아버지들밖에 없구나
랏파부시
사회당 랏파부시
이후 엔카에서 사회비판적인 주제는 많이 사라지게 되고, 사회보다는 개인의 애환, 삶의 애환을 다룬 가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강경파들은 새로운 엔카에 대해 거세게 반발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는 막지 못했다. 소에다 아젠보오를 비롯한 인물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노래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레코드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유입으로 인해 많은 엔카사들은 레코드 시장에 유입되었다.
1925년대에는 후쿠오카(福岡) 태생으로 한국인 부모에게 태어나 주로 유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코가 마사오(古賀政男)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 당시 한국가요와 민요의 요소를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3]# 그는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 "그림자를 사모하여(影を慕いて)"등으로 한 시대를 리드해나간다. 당시 그의 노래는 엔카(艶歌)·코가(古賀)멜로디라고 불리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후지야마 이치로 노래. 1931년작. 1933년 발표된 이태준의 단편인 『달밤』에 똑같은 가사가 나오는데 같은 곡인지 추가 바람.
그 이후에는 녹음기술의 발달로 이전의 단순한 반주에서 벗어나서 오케스트라나 관현악의 반주가 도입되었고, 193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재즈가 아직 금지곡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즈풍의 반주도 도입되곤 한다. 1940년대에는 적성국가였던 영미권의 음악은 금지되었지만, 남미의 라틴음악의 영향이나 독일 행진곡풍의 음악의 영향이 강해져서 전시 선전음악풍의 엔카에 다양한 퍼커션의 반주가 혼합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엔카는 쭉 이어지게 된다. 엔카 최고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등장으로 엔카는 명실상부한 일본 국민의 음악으로 자리잡게 된다.
엔카에서 사용되는 음계의 대부분은 일본 전래의 민요에서 사용되던 5음계로, 4-7음을 뺀(요나누키) 음계로 불린다. 그 중 엔카의 상징처럼 된 것이 요나누키 단음계. 소위 말하는 '뽕끼'는 이 요나누키 단음계의 특징이다. 이러한 음계법은 코가 마사오[4]의 등장 이후 이러한 방식의 멜로디라인이 확산되면서 엔카만의 독특한 음계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멜로디는 초기 클래식의 정통파인 도쿄 예술대학 출신의 후지야마 이치로의 성악 기술을 정통으로 해석한 클론 창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일본음악의 기교 표현을 강화한 뒤 1960년대에 거장 미소라 히바리의 등장으로 그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한 음계에서 각각의 가수들이 개성적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래 목록은 엄정하게 엔카 가수를 따졌다기보단 일본의 이름 있는 기성 가수들을 모아놓았다고 봐야한다. 키타지마 사부로 같이 확실히 '엔카 가수'라고 말할 수 있는이도 있지만, 엔카 풍의 노래(명월적성산)는 물론 일제의 군가(애국행진곡)나 선전가요(맥과 병대, 상해함락만만세)와 양악풍의 악곡(비파호애가)으로도 유명한 쇼지 타로는 일반적으로 '유행가 가수'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