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춤, 꾸에까(Cueca)
꾸에까란?
꾸에까(Cueca)는 칠레의 대표적인 민속춤이자 음악으로, 수탉이 암탉을 쫓아다니며 구애하고, 암탉은 그 구애를 받아들이는 것을 형상화한 커플 춤이다. 남녀가 다 흰 손수건을 들고 추며, 공식적인 경우에는 남녀가 우아소1)-치나 복장을 갖춰 입는다. 매년 9월 18일과 19일, 칠레의 가장 큰 국경일인 ‘애국 축제’(Las Fiestas Patrias)를 전후로 해서 칠레 전역에 꾸에까 리듬이 지겨울 만큼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걸 들을 수 있다.
꾸에까는 칠레 전역에서 향유되는 춤이지만 칠레 중부 지역의 꾸에까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칠레의 영토는 엄청나게 긴데 흔히 바예 센뜨랄(Valle Central)이라고 불리는 중부 지방에 스페인 문화의 이식이 가장 안정적으로 일어났고, 농업을 바탕으로 한 칠레의 민속 문화가 수 세기동안 균질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칠레 남부로 가면 칠로에 섬의 ‘꾸에까 칠로따’(Cueca Chilota: 칠로에 꾸에까)가 특징적이며, 북부에는 꾸에까 노르띠나(Cueca nortina: 북부 꾸에까)가 있다. 북부의 경우 칠레가 페루·볼리비아와 치른 태평양 전쟁 이후 칠레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칠레 문화와 영토로서의 연속성이 떨어지며 아이마라 등 안데스 원주민 문화의 영향이 강해서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꾸에까와 차별된다.
춤의 기원
스페인 어권 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들의 민속은 원주민 문화의 바탕에 스페인 문화와 언어, 춤이 강하게 이식되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칠레의 꾸에까에는 좀 더 직접적인 기원이 있는데, 그것은 페루의 사마꾸에까(Zamacueca)라는 춤이다. 페루의 사마꾸에까는 페루 부왕령2) 시기, 리마에 살던 집시들과 흑인(혹은 물라또3))사이의 음악적·문화적 혼혈에서 나온 것으로, 그 기원은 16세기에서 17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페루의 사마꾸에까가 19세기 초 칠레에 소개되어 사마꾸에까 칠레나(Zamacueca chilena)로 불리다 그 이름이 꾸에까로 줄여졌고, 춤도, 음악도 점점 칠레화되어 갔다. 부왕령이었던 페루에는 흑인 노예들이 많이 유입되어 흑인의 춤과 리듬이 사마꾸에까를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지만, 흑인 인구가 미미하고 칠레 문화 형성에 거의 기여하지 않은 칠레에서는 사마꾸에까에 담긴 흑인 문화의 특징이 시간을 두고 거의 지워졌다.
문화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하는 것임을 사마꾸에까의 다양한 버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마꾸에까를 기원으로 한 칠레의 꾸에까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로 소개되어 변형·토착화되었고, 이후 페루로 역수출되어 페루에서 칠레나(Chilena)로 알려졌다. 태평양 전쟁 이후 칠레에 영토를 뺏긴 페루는 칠레나라는 이름을 페루 해군을 기념해서 마리네라(Marinera)로 바꿨다. 페루의 사마꾸에까가 원형이 되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도 꾸에까가 존재하게 되었지만, 칠레만큼 꾸에까가 살아남아서 진화를 거듭해가고, 국가의 공식 춤으로 지정될 정도의 의미를 갖게 된 나라는 없다.
전통 꾸에까
지역적 구분 외에, 현재 시점에서 꾸에까는 전통 꾸에까(혹은 농촌 꾸에까)와 도시 꾸에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950년대부터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라는 맥락속에서 도시의 변두리, 선술집, 사창가를 중심으로 ‘도시 꾸에까’(Cueca Urbana)로 진화해나갔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형성된 꾸에까는 대체로 농촌에 정착해서 농촌의 춤과 음악으로 굳어져갔다. 농촌에서 토착화되며 발전해간 이 꾸에까를 전통 꾸에까라고 하며, 기타, 하프, 까혼4), 빤데로5) 등의 악기를 사용해서 연주한다.
1920년대 경 꾸에까는 칠레 상류층들에 의해 살롱으로 진출한다. 칠레 상류층은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전형적인 상징들을 찾았으며, 도시의 성장과 사회 갈등이 붉어지는 현상 앞에서 우아소를 등장시키고, 시골에서의 삶을 이상화했다. 그때 꾸에까는 살롱 춤에 걸맞게 되기 위해서 좀 더 우아해지고, 정제되어갔다. SP레코드에 녹음되며 3분을 채우기 위해 도입과 소개부가 첨가되면서 ‘전통 꾸에까’의 모습이 확립되었다. 당시 꾸에까를 부르고 녹음한 가수들은 Dúo Rey-Silva, Los Hermanos Campos, Fiesta Linda, Silvia Infantas y los Cóndores 등이 있다.
하지만 상류층에 의한 시골 문화의 이상화는 농촌 민속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1927년 ‘로스 꽈뜨로스 우아소스’(Los Cuatro Huasos: 네 명의 우아소)같은 남성 중창 그룹이 결성되어, 칠레의 문화 대사로서 칠레 ‘전통 음악’을 외국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도시 출신에 상류층 출신이었던 멤버들은 칠레의 농촌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나 연구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전통을 소재로 가져와서 스타일화된 민요풍의 곡들을 불렀고, 노래 가사 역시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는 등 실제 농촌 생활이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1950년대에 농촌의 삶과 민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민요를 채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창작한 비올레따 빠라의 음악과 비교해보면 그들의 음악은 사실 칠레 민요라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이다. 어쨌든 이 그룹은 우아소라는 인물을 전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현재도 축제나 쇼 등에서 보여지기 위한 꾸에까에는 전형적인 복장을 한 우아소-치나 커플이 춤을 춘다.
꾸에까의 진화: 도시 꾸에까의 출현
1950년대에 도시의 변두리에서 도시 주변부의 삶과 정서를 담은 ‘도시 꾸에까’(Cueca urbana)가 생겨난다. 특히 수도 산티아고와 항구 도시 발빠라이소의 유흥가, 사창가, 뒷골목이 중심이 되었다. 사실 도시 꾸에까는 1930년대부터 그 움직임이 있었지만, 주류 문화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도시 꾸에까를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경찰의 단속을 받을 정도였다.
도시 꾸에까의 대표자로서는 로베르또 빠라 (Roberto Parra: 1921-1995)와 ‘로스 칠레네로스’(Los chileneros) 그룹이 있다. 도시 꾸에까는 이 두 대표 아티스트들이 각각 유포시킨 이름을 따서 꾸에까 초라(Cueca Chora), 꾸에까 브라바(Cueca Brava) 등으로 불리지만 이는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이다. 도시 꾸에까는 꾸에까의 변형으로서 존재하며 음반, 라디오로 유포되던 농촌풍의 꾸에까를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주목을 받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도시 대중 문화의 상수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도시 꾸에까의 경우 피아노, 빤데로, 아코디언, 기타, 베이스, 심벌즈, 드럼, 색소폰, 전자 기타 등의 악기가 사용되며, 가사는 전원적인 테마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고 범죄, 뒷골목 인생 등을 적나라하게 다루며, 시장, 사창가, 감옥, 길거리 등에서 불려졌다. 가사는 제도권 바깥의 거친 삶을 한없이 비극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유머와 악동 기질을 담고 있다.
연극 <라 네그라 에스떼르>와 도시 꾸에까의 재조명
로베르또 빠라는 빠라 형제 중 한 명으로(칠레의 시인 니까노르 빠라, 음악가 비올레따 빠라의 동생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 일련의 도시 꾸에까 음반을 냈다. 70년도에 조카 앙헬 빠라와 같이 만든 음반 <로베르또 삼촌의 꾸에까(Las Cuecas del Tío Roberto)>로 로베르또 빠라 식 도시 꾸에까는 ‘꾸에까 초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70년대에 락 음악 등 다른 대중 음악에 가려서 사라지는 듯 했던 도시 꾸에까는 88년 연극 <라 네그라 에스떼르(La negra Ester)>’의 성공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로베르또 빠라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시집 《네그라 에스테르의 데시마스(Las décimas de la Negra Ester)》가 연극의 원작이 되었으며, 이 시집은 그가 산 안토니오 항구의 술집에서 알게 된 에스테르라는 창녀와 나눈 사랑 이야기를 칠레 전통 민속 시 형식 10연시, 즉 데시마(Décima) 형식으로 쓴 것이었다. 시집은 80년도에 출간되었으며, 이를 88년에 극단 Gran Circo Teatro가 안드레스 뻬레스(Andrés Pérez) 감독의 연출로 연극으로 옮겼다. 이 연극의 성공으로 평생 술에 빠져 도시의 뒷골목에서 무명 악사나 다름없이 살아가던 로베르또 빠라는 일순간 칠레의 도시 폴크로레(folklore)의 상징으로 떠올랐으며, 그가 평생 가꾸어 온 음악 꾸에까 초라, 재즈 과차까(Jazz Guachaca)는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라 네그라 에스떼르>의 명성 이후 로베르또 빠라는 93년부터 젊은 예술가들과 다양한 작업을 했으나, 95년 암으로 사망했다.
<라 네그라 에스테르>가 성공한 뒤 도시 꾸에까에 대한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이 늘어났고, 특히 인기있는 칠레의 락 그룹 로스 뜨레스(Los Tres)는 1996년 언플러그드 음반에서 로베르또 빠라의 곡 세 개를 부르고, 98년 만든 음반 <Peineta>에서 그의 꾸에까 곡들을 연주함으로써 새로운 젊은 세대가 꾸에까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음악가인 마리오 로하스는 1999년 로스 칠레네로스의 멤버인 나노 누녜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나노 누녜스의 꾸에까 브라바(La cueca brava del Nano Núñez)>를 만들었고, 이러한 재조명 이후 로스 칠레네로스는 68년에 마지막 음반을 낸 뒤 33년이 지난 2001년, 라이브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꾸에까 그룹 Los Santiaguinos, Los Paleteados del Puerto, Los Afuerinos, Las Capitalinas, Los Tricolores 등도 새로이 등장했다.
79년 군부는 꾸에까를 칠레의 공식 춤으로 선포했지만, 군부의 이러한 행위는 꾸에까의 가장 진부하고 보수적인 전통으로서의 의미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 행사에서 추는 전형적인 꾸에까는 사실 몇 곡 이상 듣고 보게 되면 조금 지겨워진다. 공식 영역으로부터의 인정보다는 꾸에까는 농촌 문화 속에서 살아있는 꾸에까는 채록한 비올레따 빠라와 도시의 뒷골목에서 도시 꾸에까를 가꿔나간 로베르또 빠라의 존재,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이 전통을 질료로 그것을 새로이 해석해나가고 다른 장르의 음악과 섞는 실험을 지속하는 가운데 생명력을 얻어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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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아소(huaso)는 칠레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남성 인물형으로, 말을 타고 농장과 가축을 돌보는 존재이며 뽄초를 입고, 신발에는 화려한 박차를 달고 있다. 춤의 짝이 되는 여자는 치나(china)라고 하는데, 께추아 어에서 기원한 단어로 신에게 봉사하는 여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우아소의 화려한 옷차림에 비해서 수수한 원피스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치나는 대조적이다.
2)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통치하던 단위. 스페인에 왕국이 있고, 아메리카 대륙을 네 개의 부왕령으로 나누어서 통치했다.
3) 흑인과 백인 혼혈.
4) 속이 텅 빈 나무 상자 타악기. 가톨릭 교회에서 흑인 노예들이 북을 치는 것과 북 자체를 금지해버리자 얼마 후 대안으로 만들어진 악기로, 19세기 페루에서 기원했다.
5) 탬버린 보다 조금 큰, 아랍 기원의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