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22:32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
피트 시거를 위한 변명 혹은 추모



2011년 싸늘한 뉴욕의 10월 밤 백발의 한 노인이 기타를 손에 들고 맨해튼의 무대에 올랐다. 무대 주위에는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금융자본의 탐욕에 항거하여 ‘월가 점령’을 외치며 몰려든 시민들로 가득했다.

그 노인은 늙고 가녀린 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하지만 그의 노쇠한 성대는 이미 이전과 같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진동을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 채, 금세 젊은이들의 노래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힘찬 기타의 울림만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무대에 서겠다는 노장의 의지를 뜨겁게 전하고 있다. 그의 노래 소리는 아마도 추운 밤, 앞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투쟁에 지쳐있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온기를 전했음이 틀림없다.

이 할아버지는, 바로 며칠 전 길고 긴 인생길의 마지막을 접고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대표적 포크 가수인 피트 시거(Pete Seeger, 1919-2014)이다.

그의 길고 긴 음악 인생을 돌아보면, 노동운동, 공민권운동에서 베트남 반전운동, 환경운동을 거쳐 월가 점령 시위까지 현대 미국의 민중저항사는 그의 노래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민요를 연구하고 이를 도시민들에게 소개하던 이 포크 가수는 왜 저항가요 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시거에 의해서 대중화된 오랜 가스펠송 <We Shall Overcome>은 왜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두에 미국에서 개시되었고 이후 세계 각지의 민중가요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 ‘포크 리바이벌’ 운동 즉 민요 부흥 운동이 있었다.

포크 리바이벌 운동은 본래 미국 북동부에 전해지는 영국에서 기원하는 민요 같은 전통가요를 발굴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전통가요의 레퍼토리나 스타일을 공민권운동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과 결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운동 초기의 가수로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를 들 수 있고, 1950년대 후반 이후 운동의 고양기와 상업적인 성공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피트 시거나 존 바에즈(Joan Baez, 1941-), 혹은 나중에 록으로 전환하여 포크 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밥 딜런(Bob Dylan, 1941-) 등이 있다.

이들은 어쿠스틱 기타나 전통악기만을 사용하는 연주법을 고집하여 전자악기의 사용에 저항했으며, 민요를 발굴하고 연구하기도 했던 관계로,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현하는 운동으로 오해되어, 특히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꺼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애국자’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그들의 운동도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아이덴티티 형성을 목표로 ‘포클로어’(Folklore)에 주목한 19세기식 국민적 낭만주의 열풍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그들이 주로 소개한 민요들은 체제가 주목하지 않거나 혹은 체제가 억압했던, 정치적 권위에 저항하고 전쟁을 비판하고, 농촌의 피폐상을 노래한 곡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민중 저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림으로써 새로운 정치운동의 기점을 마련해 갔으며, 계급적 시각의 노동운동과도 연계하여 사회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급진적 노동운동 조직으로 유명한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의 운동가요집 Little Red Songbook 수록곡들은 그들이 애창했던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iww 노래집

IWW 노래모음집의 표지

이렇게 민요의 주체로서 민중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전통성 못지않게 정치성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이전의 국수주의적인 민요부흥운동과 이들의 음악운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피트 시거 자신도 40년대에 미국공산당(CPUSA)의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그로 인해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소환되기도 하여 오랫동안 미디어의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평생 반공세력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국수주의적 민요부흥운동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레퍼토리에 왕성하게 추가되었던 것이 미국이나 영국 태생의 곡 못지않게 타문화권의 전통가요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2009년의 인터뷰에서 시거가 “내 직업은, 세상에는 좋은 음악이 많이 있고 그것이 잘 활용된다면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듯이, 그들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 약자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노래로 대변함으로써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존 바에즈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나 도나(Donna Donna)>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운명을 노래한 동구 유대인들의 이디쉬(Yiddish) 노래에서 기원한 곡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시거가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민요에는 쿠바의 농민가요인 <관타나메라(Guantanamera)>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자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의 시를 대입하여 호세이토 페르난데스(Joseíto Fernández, 1908-1979)가 편곡한 버전이다.

가사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con los pobres de la tierra) 나는 나의 운명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다.

시거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1963년은 마침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 직후였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이 쿠바혁명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대항하여 일체감을 추구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지향은 마르티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거는 쿠바의 민중가요를 자신의 레퍼토리에 적극적으로 추가하면서 반제, 반전평화 운동을 노래로써 확산시켰던 것이다.

혹은 시거의 대표곡이자 대표적인 반전가라고 할 수 있는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1961)는, 소련 작가 숄로호프(Mikhail Sholokhov, 1905-1984)의 소설 [고요한 돈강]에 인용된 코사크 민요 “꽃은 다 어디로 갔나? 소녀들이 다 꺾었지/ 그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녀들은 다 결혼했지/ 그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다 군대에 갔지”라는 가사에 촉발되어 만들어 진 것이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어 “언제쯤이면 그들은, 우리들은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달을까”라는 메시지를 가진 반전가로 세계적으로 퍼져갔다.

특히 독일어 버전이 유명했으며, 피트 시거의 영향은 독일의 68년 ‘성난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된 포크 리바이벌 운동에도 미쳤다. 피트 시거 자신도 동서독을 오가면서 음악가들과 교류했으며, 나치의 양심수 수용소에서 만들어진 저항가인 <늪지의 병사들(Die Moorsoldaten)>을 불러 국제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서 피트 시거하면, <아리랑(Ariran)>(1953 혹은 1954)을 부른 서구의 가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미국의 포크가수가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에만 경탄하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정작 그가 부른 그 <아리랑>이 어떤 <아리랑>이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아니다. 그것은 3.1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과 조선 민족해방운동을 결합시키고자 진력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님 웨일즈와 함께 작성한 자신의 회고록 [아리랑: 조선이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1941)의 서두에서 소개한 그 <아리랑>이다.

시거는 이 책에 기초하여 <아리랑>이 조선 왕조의 폭정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죽음으로써 저항하는 희생정신의 노래라는 걸 소개하며 분단의 역사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김산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한국에서는 오래도록 금서로 있다가 1984년에 비로소 번역소개된 것을 떠올리면, 시거가 저항가요로서의 <아리랑>을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일부 국내 언론이 시거가 한국전쟁 참전시에 <아리랑>을 들었다고 한 것은 오보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추구한 ‘포크 리바이벌’이라는 것은, 다양성과 정치성을 추구하며 위로부터의 전통에 저항하는 ‘민중의 전통’ 구축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반제, 반전, 반자본적 계급 지향성이 뚜렷했으며, 시거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했던 노래”를 민중운동 속에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권력과의 긴장관계이며, 그것이 느슨해지는 순간, 그는 하염없이 ‘애국자’의 길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시거가 만년에 국가로부터의 각종 표창을 받고 오바마 대통령 취임 콘서트에서 노래했을 때, 그는 허드슨 강의 정화운동에 헌신하고 전통을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한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기억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를 국민의 역사 속으로 회수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포크 리바이벌 운동을 탈환하고자 한다면, 시거가 일관되게 견지했던 탈국가적 계급 지향성을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환경적 정의는 경제적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 환경주의자 시거의 “말”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가 부른 <이 땅은 당신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이 조국 찬미의 노래가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읊은 곡이었다는 그의 “노래 정신”이 묻히지 않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에 믿었던 것은 “노래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 했다”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 20century 60's 초 

포우크 송에는 작자불명의 옛 민요*와, 그 소박한 가곡형식과 정신을 근거로 삼은 현대의 포우크 송이 있으며, 여기서는 미국의 후자, 이른바 모던 포우크 송, 컨템퍼러리 포우크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의 이민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이 나라에는 영국을 주로 한 유럽 각국 민요의 가사를 바꾼 발라드나 흑인이 비참한 생활을 호소한 것 등이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레코드의 보급과 함께 흑인의 블루스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취입이 매출되는 동시에 존 및 앨런 로맥스 등에 의한 조사 채집도 실시되고, 거기에 자극받아 민요연구가 · 가수의 소박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트 시거는 흑인 포우크 블루스 가수 레드베리와 불황시대의 미국을 노래한 우디 거슬리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자작곡에 의해 우경화(右傾化) 해 온 미국정부며 인종차별에의 저항,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포우크 운동에 정진, 19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나 시민권운동과도 결부된 포우크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존 바에즈를 비롯, 로크 이디엄을 살린 봅 딜런은 그 대표적인 가수, 싱거=송 라이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크 송 [folk song]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

----------- 60s's 초 

모던 포크음악의 선구자, 피터 폴 & 메리
맑은 멜로디와 날카로운 진보적 성향의 가사로 인기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미국 포크음악의 대중적 효시라고 불리는 피터 폴 & 메리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입술에 닿기만 해도 절로 녹아내리는 달콤한 솜사탕처럼, 그들의 노래는 한 편의 동화이자 할머니가 손자를 재우면서 불러 주시는 자장가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 포크음악계를 석권했던 당시의 시대를 돌아보면 사정이 동화처럼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피터 폴 & 메리는 미국 전역에서 반전과 저항이라는 홍역을 앓던 60~70년대에 대중성과 저항성의 경계에서 모두를 아우르는 백인 취향의 깨끗하고 맑은 멜로디와 날카로운 진보적 성향의 가사로 미국 모던 포크의 중심에 서있던 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은 베트남전, 흑인민권운동, 히피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미국사회의 양심과 아픔을 아름답고도 애잔한 선율로 표현했던 그룹이다.



 



1961년 미국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마을에 살던 피터 야로우, 노엘 폴 스투키, 그리고 메리 트레버스 세 사람의 만남은 포크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연예활동을 하며 포크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 셋은 혼성 트리오를 만드는 일에 합의해 그룹 이름을 멤버 각자의 이름에서 고유명사를 하나씩 합친 ‘피터 폴 & 메리’가 탄생하게 된다.



 



홍일점인 메리가 리드보컬을, 나머지 둘은 백 보컬을 맡았는데, 데뷔 초기에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 나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포크음악의 대가 밥 딜런의 매니저였던 앨버트 그로스먼이 이들의 공연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목표했던 메이저 무대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다.



 



그로스먼의 후원으로 1962년 첫 앨범 ‘Peter Paul & Mary’가 발표되는데, 이 앨범에 들어있는 ‘If I Had a Hammer’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망치로 위험을 제거하고 종을 울리며 모든 동포를 위해 노래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당시 저명한 가수 피트 시거에 의해 작곡된 이 작품은 빌보드 싱글차트 10위로 상승하면서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 유명한 올드 포크 넘버인 ‘레몬 트리’도 데뷔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고 이 역시 차트 12위에 오르면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데뷔 앨범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그들은 두 번째 앨범 ‘Moving’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포크의 영원한 명곡인 ‘(Puff)The Magic Dragon’이 탄생했는데, 동화적인 분위기를 절로 연상케 하는 더없이 감미로운 이 곡은 당시 ‘Puff’라는 단어가 마리화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uff’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은 세 번째 앨범인‘In the wind’에서는 밥 딜런이 작곡한 포크의 명작‘Blowin' In The Wind’를 그들만의 하모니로 리메이크함으로써 가공할 만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자칫했으면 포크의 역사에서 묻혀버릴 뻔 했던 피트 시거의 If I Had a Hammer나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도 대중적으로 사랑받으며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피터 폴 앤 메리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리메이크한 포크의 숨겨진 고전들은 모두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피터 폴 & 메리의 모던 포크의 재해석 능력은 대단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Lemon Tree, 500Miles, Puff, The Magic Dragon, Gone the Rainbow, Blowin' In The Wind, 존 덴버의 곡 Leavin On A Jetplane 등 수많은 자작곡과 리메이크 곡들을 차례로 히트시키면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혼성 트리오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피터 폴 & 메리는 음악적 성공에 머무르며 결코 안일한 스타의 삶을 영위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민권 운동에 참가하여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고, 월남전 반대 시위에도 그들은 기타와 목소리를 가지고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로 인해 피트 시거의 곡 If I Had A Hammer는 시민운동의 성가로 각지의 집회에서 불려 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피터 폴 앤 메리는 사회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반전과 평화와 자유를 외치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아티스트로써 그들의 유명세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공연 활동과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로, 지난 2003년에는 나이가 많이 들어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한 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 모습을 표지로 한 앨범 ‘In These Times’를 선보였다.



 



피터 폴 & 메리는 1961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결성되어 1970년 해체되고 재결성되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지금까지 불리어지는 수많은 포크 명곡을 양산해낸 밴드로 팝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밴드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posted by 人心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