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nic electronica - world music 과 electronic 음악이 합쳐짐
deep forest가 대표적인 ethnic electronica그룹으로 평가되는것은 샘플링을 주축으로 하여 전체적인 곡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는 그렇기 보다는 특정 멜로디를 주축으로 한 채 그 곁에 샘플링 소스를 갖다 붙인듯한 느낌을 주기 떄문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는 것 같다. 아래에 첨부한, 그저 일렉트로닉 음악인 14번 트랙 La Veuve Furieuse의 예도 있고...(차라리 the prodigy가 생각나네)
또다른 예를 들자면, 8번트랙 L'lle Invisible에서의 피아노 멜로디를 주축으로 1번 Pacifique를 구성하였는데, 이때의 느낌은 그들의 이전앨범 Boheme의 6번 트랙 Bulgarian Melody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듣다 보니 L'lle Invisible에서는 왠지 debussy의 느낌도 나는것 같고, 그래서 이 앨범('Art of Noise - Seduction of Claude Debussy')의, 특히 9번트랙, La Flute De Pan을 이어서 들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는다. 물론 이 앨범이 생각난것은 지난 글에서도 적었듯, 이 음악가들 서로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롤러장 음악이라고 불리우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언듯 들어보면 왠지 팝송처럼 들린다.[2]
이탈로 디스코의 시초는 1978년 라 비욘다라는 2인조 디스코 형제가 One For You, One For Me[3]라는 곡으로 히트치면서 시작되었다. 그 히트곡을 낸 뒤, 라 비욘다형제는 다른 가수들에게 프로듀서 역할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점점 이탈리아만의 디스코 음악이 탄생되었으나 이때까지는 아직 장르로 구분되지 않았다. 이탈로 디스코(Italo Disco)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은 1983년 독일의 베른하드 미쿨스키(Bernhard Mikulski)가 이 장르의 곡들을 모아 The Best of Italo-Disco 등 "Italo"라는 글귀가 들어간 앨범들을 내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잊혀져가던 이탈로 디스코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2000년대 후반부에 일본에서 있었던 작은 유로비트 성황기였다.이때를 기회로 타임 레코드나 A Beat-C,Asia같은 원로 레코드들은 옛날 이탈로 디스코들을 유로비트 방식으로 리메이크하여 이탈로 디스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린다.이렇게 이탈로 디스코는 새로운 방식의 믹스들을 많이 선보여서,옛날처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부활을 마친상태다. 2010년대 들어서 유로비트 시장의 상황이 갑작스럽게 안좋아진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인 상황.
한국에서도 롤러장 음악으로 인기가 있었던 덕분인지 가끔 최신곡으로 "복고풍 댄스곡"이라 내세우면 거의 이탈로 디스코 형태의 음악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게 달샤벳의 "있기 없기".
Europe, Canada, Japan, Latin America, Australia, New Zealand, South Korea, Africa, Singapore, Malaysia, China (including Hong Kong and Macau), Taiwan, Mexico, United States
'유로 댄스(Euro Dance)' 혹은 '유로 디스코(Euro Disco)'는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유럽 지역에서 인기를 얻은 춤추기 좋은 댄스 음악이나 디스코를 말한다. 그런데 댄스와 디스코 앞에 왜 '유로'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댄스, 디스코와 스타일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의 댄스 음악은 미국의 그것에 상대적으로 멜로디에 더 역점을 두고, 드럼 머신이나 시퀀스를 사용한 리듬과 비트는 매우 반복적이다. 그래서 유로 댄스는 친근한 선율과 기계적인 사운드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미 대륙에 비해서 유럽에 살고 있는 흑인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리듬과 비트에 있어선 최적의 인프라를 가지고 태어난 흑인들의 그 동물적인 바운스 감각을 음악 속에 끌어들이기엔 유럽에서 호흡하는 흑인들의 수가 대서양 건너편보단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하나는 유로 디스코의 메카가 독일이라는 점이다. 경공업보다는 중공업이나 전자공업에 중점을 둔 독일의 이러한 국가육성정책은 음악에 그대로 나타난다. 독일 출신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나 노이(Neu) 같은 뮤지션의 음악이 바로 인더스트리얼이나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회자되는 것 우연이 아닌 중요한 포인트다. 드럼 머신을 이용한 유로 댄스 음악도 바로 이러한 구조에서 탄생한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의 디스코를 받아들인 유로 디스코의 중심지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일(당시엔 서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보니 엠(Boney M), 실버 컨벤션(Silver Convention), 아라베스크(Arabesque), 징기스칸(Dschinghis Khan) 그리고 영국 출신이지만 서독에서 활동했던 이럽션(Eruption) 등이 모두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인기를 얻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60년대 후반 서독에 정착한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Donna Summer)는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 서독의 뮌헨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당시 유로 디스코를 '뮌헨 사운드'라고도 했다(마치 '필라델피아의 사운드'나 '멤피스 사운드'처럼). 훗날 도나 서머는 유럽의 댄스음악과 미국 디스코의 통로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멜로디가 뚜렷하며 반복적인 리듬이 특징인 유로 댄스는 미국보다 빨리 1970년대의 디스코텍과 작은 클럽에서 유행했던 테크노와 하우스 뮤직 등의 스타일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귀에 쉽게 들어오는 장점을 소유하고 있는 유로 댄스는 그 체질상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노래를 부른 가수나 뮤지션보다는 그 음악을 주도한 프로듀서나 제작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앨범보다는 한 두 곡의 단발 싱글로 승부수를 띄우기 때문에 원 히트 원더(반짝 히트)가 많다는 점이다.
유로 디스코의 핵폭발을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은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와 프랭크 파리안(Frank Farian).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조르지오 모로더는 도나 서머가 부른 'Love to love you baby', 'I feel love', 'Heaven knows' 같은 노래들로 1970년대 중반에 전 세계를 평정한 독보적인 주인공이다. 나중엔 블론디(Blondie)의 'Call me', 베를린(Berlin)의 'Take my breath away', 아이린 카라(Irene Cara)의 'Flashdance... what a feeling', 영화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의 사운드트랙 등을 맡아 디스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서울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로 1988년 그해 독일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던 코리아나(Koreana)의 'Hand in hand'를 작곡했다는 사실! 한국과도 관련이 있어서 더욱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순수 게르만 혈통의 프랭크 파리안은 지금까지도 레게 디스코의 원형으로 그 이름이 보존되고 있는 보니 엠과 팝 역사상 가장 커다란 사기 사건의 장본인인 밀리 바닐 리(Milli Vanilli),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인기를 얻은 라 부시(La Bouche) 등을 발굴한 제작자로 조르지오 모로더보다는 덜 언급되지만 빼놓아선 안 되는 중요한 사람이다.
독일 외에 유로 디스코 문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또 다른 유럽 국가는 바로 프랑스다.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추던 장소를 일컫는 디스코텍은 바로 불어 'Discotheque'에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프랑스어로 레코드 케이스나 레코드 수집 실을 뜻하지만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디스코텍으로 그 의미가 정의되었다. 그 정도로 디스코는 미국에서 발생된 음악이지만 유럽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스페인의 여성 듀엣으로 'Yes, sir I can boogie'의 바카라(Baccara), 'Sun of Jamaica'의 굼베이 댄스 밴드(Goombay Dance Band), 'Sexy music'의 놀란스(Nolans), 'Wanted'의 둘리스(Dooleys)도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 그룹들로 유로 디스코의 대표적인 팀들이다.
하지만 디스코의 열기가 급속히 식으면서 유로 디스코란 단어 대신 좀 더 포괄적인 단어인 '유로 댄스'라는 단어에 귀속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은 모던 토킹(Modern Talking), 런던 보이스(London Boys), 조이(Joy)부터 1990년대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리얼 맥코이(Real McCoy),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 아쿠아(Aqua), 투 언리미티드(2 Unlimited), 라 부시, 블랙 박스(Black Box), 에펠 65(Eiffel 65) 등이 여기에 속하고 호주 출신의 미녀 가수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의 노래도 유로 댄스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1960년대 말 R.무그에 의해 신시사이저(synthesizer)라는 전자회로를 응용한 건반악기가 개발되자, 록뮤지션들은 신시사이저를 응용한 스페이스사운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 음악에서는 특히 유럽계 뮤지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서독의 4인조 클라프트 베르크, 프랑스의 디디에 마루아니, 장 프랑수아 자르, 그리스의 반제리스 등이 스페이스사운드, 별칭 우주음악(cosmic music)으로 록뮤직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또한 음악 자체가 일종의 공식화가 되어있어서 16비트 드럼비트에 업비트 베이스라인을 끼워 맞추면 어떤 곡이든 디스코로 변형시킬수 있는 마법의 음악이기도 하다(...). 노래방에 가서 리모콘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주를 디스코로 바꿔주는 버튼이 있는데, 이걸 켜보면 마법을 체험할 수 있다....
일단 이 음악은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비해 "지나치게" 말초적인 음악이었고, 댄스뮤직에 대한 당대의 거부감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게이 클럽이나 일부 제한된 사이키델릭 클럽, 히피 클럽의 플레이리스트에 오르곤 했다.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나서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74년경이나 되어서의 이야기다.[1][2] 그리고 당시로서 당연한 반응이지만, 평론가들은 이 음악을 저속하다고 엄청나게 깠다.그리고 30년뒤에 힙한 문화로 재조명된다
이전에는 위의 이유들로 인해 이래저래 경박하고 품위없다는 이미지가 강해 하는 사람만 하는 비주류 문화였으나, 1977년 12월 개봉된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라는 영화와 동시기에 발매된 사운드 트랙이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며 '디스코'라는 장르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게 된다.
흑인들이 유행시킨 음악중 하나이고 위에 써있는 바 대로 게이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1979년도에 디스코 폭파의 밤 사건이 일어나 디스코 관련 상품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점점 인기를 잃어갔지만 음악 자체의 영향력은 시대가 지나면서 일종의 복고 열풍으로 인해 재조명되었다. 현재는 록과 댄스뮤직이 섞이면서 디스코스러운 소스를 많이 차용한 곡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독자적으로 발전하여서, 나중에 Nu-NRG, Hi-NRG, 해피 하우스, 유로비트등의 장르로 발전하였다. 이탈로 하우스가 유로비트의 조상이라고 하면 믿겠는가? 사실 유로비트를 느리게 하면 후기 이탈로 하우스와 비슷해진다.
디스코 복고 열풍 이전에 디스코 시대 이후의 Hi-NRG와 쌍벽을 이루는 과도기적 음악으로 포스트 디스코(후기 디스코)라는 음악 장르가 존재했었다. 하지만 포스트 디스코는 소울과 재즈를 강조함으로서 [3][4]현대 R&B나 네오소울, 소울풀 하우스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유행한 시기는 1978년부터이다. 원래 1975년경부터 비지스를 비롯한 다양한 디스코 그룹들이 소개되었으나 당시 일명 "다운타운 디제이"[5]들 사이에서 유행했을 뿐, 대중적인 인기는 없었지만 1978년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가 유행한 이후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