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4. 6. 17. 20:10

EDM / Electronic Dance Music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Electronic Dance Music)의 약자. 용어 자체는 1980년대 이


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프로디지와 

보이 슬림케미컬 브라더스언더월드 등의 미국 음악시장 진입으로 인해서이다.

 당시 미국 음악계는 이 현상을 'American electronica revolution' 이라 부르며 집중

적으로 취재하였으나 미국 내의 전자음악 시장은 갑작스런 관심에 대처할 만한 기

반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고, 산업의 외곽으로 밀려난 미국 전자음악 프로듀서들

은 해외로 나서야만 했다.

이후 2011년, 일렉트로 하우스와 프로그레시브 하우스를 바탕으로 전자음악이 유

행하게 되고 팝 음악에도 전자음악의 바람이 불게 된다. 또한 전에는 부족했던 자

본적 기반이 Robert F. X. Sillerman이 설립한 SFX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마련되

며 비트포트 등의 전자음악 시장과 페스티벌 이벤트가 마련되었고, 2012년 10월

1일, MTV는 'EDM Invasion: How the Rave Wave has conquered America'이라는 

칼럼을 통해 이것이 새로운 세대의 유행이자 음악의 산업화임을 입증하였다.


google.com


youtube.com


amazon.com



http://www.discogs.com/search/?style_exact=Electro&genre_exact=Electronic&genre_exact=Pop&decade=2010


http://www.beatport.com/genre/pop-rock/39/tracks?perPage=100


http://www.juno.co.uk/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6. 16:58

http://escape.ncity.net/wiki/%EC%9D%B8%EB%8D%94%EC%8A%A4%ED%8A%B8%EB%A6%AC%EC%96%BC#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



인더스트리얼 / Industri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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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발매된 Industrial Records의 컴필레이션 The Industrial Records Story

실험적 전자음악의 한 종류. 1978년 스로빙 그릴스의 등장과 그들이 설립한 레이블 Industrial Records, 슬로건 “industrial music for industrial people”이란 말에 의해 탄생했다. 장르는 락과 아방가르드한 전자음악, 노이즈무지크 콩크리트의 융합된 형태이며 거칠고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이 많다. 급진주의와 뉴웨이브 운동, 다다이즘 퍼포먼스 등에 영향을 받아 종합 예술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최초의 인더스트리얼은 노이즈와 파시즘, 연쇄살인, 오컬트 등의 사회적 논쟁거리를 음악적, 시각적으로 나타내려 하는 시도가 많았으며 아티스트들은 음악만이 아니라 메일 아트, 퍼포먼스, 설치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적 실험을 행하였다. 또한 음악가들은 당대의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아티스트 외에도 미국의 작가 윌리엄 S. 버로스,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극단적 해체주의에 기반한 인더스트리얼 뮤직을 올드스쿨 인더스트리얼이라고 부른다. 이후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운동과 함께 스키니퍼피가 고딕적인 컨셉을 선보였고 이는 기존의 극단적 해체주의와 달리 대중적으로 더 잘 받아들여지는 컨셉이였다. 이후 인더스트리얼씬은 고스키드들이 많이 유입되었으며 지금 인더스트리얼의 주류는 고스라고 할수있다. 덕분에 인더스트리얼씬도 덥스텝씬처럼 신구갈등이 존재한다.

최초의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은 다양한 아티스트에 영감을 얻었다. 그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음악가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조이 디비전, 마틴 데니 등이 있으며, 스로빙 그릴스의 멤버인 Genesis P-Orridge는 1979년 인터뷰를 통해 The Doors, Pearls Before Swine, The Fugs, Captain Beefheart, Frank Zappa 등의 1960년대 락 음악의 공을 치하했고 다른 멤버인 Chris Carter는 Pink Floyd와 Tangerine Dream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Boyd Rice는 Lesley Gore와 ABBA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고, Z'EV는 Christopher Tree (Spontaneous Sound), John Coltrane, Miles Davis, Tim Buckley, Jimi Hendrix, Captain Beefheart 등의 음악과 함께 티베트, 발리, 자바, 인도, 아프리카 음악 등이 자신의 예술적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Roxy Music과 Kraftwerk의 Trans-Europe Express, 또한 무지크 콩크리트를 연상시키는 초기의 실험작품이나 Morton Subotnick 등의 현대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Nurse with Wound는 그들이 추천하는 즉흥연주(free improvisation)와 크라우트락의 긴 목록을 인용하기도 하였으며, 23 Skidoo는 아프로비트 뮤지션 Fela Kuti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On the Corner를 차용한 음악을 만들었다. Einstürzende Neubauten를 포함한 많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이 월드뮤직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초기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은 작가 혹은 사상가의 개념을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 초기 스로빙 그릴스는 자신들의 음악적 영감을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에서 받았고, SPK는 장 뒤뷔페,, 마르셀 뒤샹, 장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발터 벤야민, 마샬 맥루한, 프리드리히 니체, 질 들뢰즈와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카바레 볼테르는 윌리엄 S. 버로스, J. G. 발라드, 트리스탕 차라 등의 문인들에게서 사상의 개념을 차용하기도 했으며 Whitehouse와 Nurse with Wound는 그들의 작품 일부를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전자음악 비평가인 사이먼 레이날드는 이를 들어 “스로빙 그릴스의 팬이 되는 것은 과격한 문화의 대학과정에 등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역사

초기 (~1980, Industrial Music for Industrial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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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빙 그릴스의 1976년 Prostitution 전시회 포스터

장르의 탄생에 지대한 역할을 한 슬로건 “Industrial Music for Industrial People”은 원래 미국 출신의 인더스트리얼 음악가 Monte Cazazza에 의해 만들어진 표현이었다고 한다. 이후 슬로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Industrial Records를 바탕으로, 런던의 스로빙 그릴스, 셰필드의 카바레 볼테르, 미국의 보니 라이드 a.k.a NON에 의해 인더스트리얼 운동이 일어난다.

초기 인더스트리얼은 여러 전위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국의 작가 Alexei Monroe는 최초의 전자음악가 중 한명인 크라프트베르크를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비학문적 전자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아티스트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초의 인더스트리얼 뮤직은 산업 기계와 전자기기를 이용한 소리가 대부분이었으며, 신디사이저, 샘플러, 전자 퍼커션 등의 악기가 사용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또한 그는 인더스트리얼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자살'을 언급하기도 했다. 초기 인더스트리얼에 영향을 준 또다른 음악은 Lou Reed의 Metal Machine Music이다. 기타의 피드백 사운드로 구성된 이 앨범은 피치포크에 의해 “현대의 많은 아방가르드, 특히 노이즈 음악에 영향을 준 음악”으로 언급되었으며 이후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비 음악적 소리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스로빙 그릴스의 전신은 영국의 아트/퍼포먼스 그룹 COUM Transmissions이다. P-Orridge, Cosey Fanni Tutti에 의해 1972년 결성된 COUM은 처음에는 싸이키델릭 록 그룹으로 시작되었으나 영국의 예술위원회에서 보조금을 얻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퍼포먼스 아트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Peter Christopherson, Chris Carter의 합류와 함께 그룹명을 스로빙 그릴스로 바꾼 이들은 1976년 10월 Prostitution (매춘)이라는 이름의 첫번째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 전시회에는 멤버 Tutti의 포르노그래피 사진과 그녀가 사용한 탐폰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전시회는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에 취소되었으며, 당시 보수 정치인이었던 Nicholas Fairbairn는 “공적 자금이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파괴하기 위해 여기에 낭비되고있다”고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스로빙 그릴스에 대해서는 “문명 약탈자”라는 거센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스로빙 그릴스는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81년 P-Orridge의 “미션은 끝났다” (the mission is terminated.) 란 말과 함께 그룹은 잠시 해체된다.

이후 Clock DVA, Nocturnal Emissions, Whitehouse, Nurse with Wound, SPK와 같은 그룹이 등장하여 인더스트리얼의 계보를 잇는다. Whitehouse는 자신들의 음악을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극단적인 음악”이라 주장하였으며 이는 결국 파워 일렉트로닉스로 분화된다. Steven Stapleton는 Whitehouse의 초기 동업자로써, 1978년 Nurse with Wound를 만들고 노이즈와 사운드 콜라주 음악을 실험하게 된다. Clock DVA는 자신의 목표를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 (Surrealist automatism)의 개념과 함께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펑크 (Punk)와 바디 뮤직에서 비롯된 강렬한 에너지, 당신을 움찔하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 23 Skidoo는 Clock DVA와 마찬가지로 인더스트리얼 뮤직과 아프리칸-아메리칸 댄스 뮤직을 융합시킨 것 뿐만 아니라 1982년 월드 뮤직을 주제로 한 WOMAD Festival에서 자신들을 인도네시아의 합주 악기 가믈란에 비유하며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스웨덴의 그룹 Leather Nun은 1978년 Industrial Records와 계약하며 스로빙 그릴스와 Monte Cazazza를 제외한 Industrial Records의 첫 아티스트가 되었다.

한편 대서양을 건너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이 일어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Monte Cazazza를 필두로 Boyd Rice는 기타의 드론음과 테이프 루프를 이용해 반복적인 소리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노이즈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보스턴의 Sleep Chamber와 Inner-X-Musick은 초기 형태의 EBM과 파워 노이즈의 혼합을 실험하였으며 1980년 이탈리아의 Maurizio Bianchi는 이러한 인더스트리얼의 미학을 공유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Einstürzende Neubauten가 등장하여 금속 타악기, 기타, 그리고 각종 기상천외한 도구 (착암기나 뼈 등)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벌여 그들의 공연장소를 망가뜨리곤 했다. 그룹의 멤버인 Blixa Bargeld는 프랑스의 시인 Antonin Artaud와 암페타민에 대한 열광에서 영감을 얻어 Die Genialen Dilettanten이라는 이름의 예술운동을 전개한 적도 있다.

중기 (인더스트리얼의 성장 및 EBM, 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 등의 분화)

인더스트리얼의 첫번째 중요한 시기는 1980~1984년이었다. 비록 1981년 스로빙 그릴스의 해체가 있었지만 장르쪽에서는 EBM과 노이즈코어 등의 분화가 생겨났으며, 수많은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발매한 것이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의 인더스트리얼은 펑크 (Punk)와 메탈, 고스 등의 장르와 연관되었으며 더욱 거친 전자음 사운드를 연마하기 시작한다.

스로빙 그릴스의 해체 이후, P-Orridge와 Christopherson는 Psychic TV를 설립하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다. 이들의 첫 음악은 이전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비해 접근하기 쉽고 멜로디가 있었으며, 음악 교육을 받은 뮤지션들을 기용하였다. 이들의 이후 작품은 초기 인더스트리얼의 사운드 콜라주와 노이즈 요소들을 포함하였다. 또한 그들은 펑크 (Funk)와 디스코 등의 요소를 차용하기도 했다. 또한 P-Orridge는 종교단체 컨셉의 비디오 아트 조직인 Thee Temple ov Psychick Youth를 설립하기도 했다. Psychic TV의 상업적 활동은 Some Bizzare records의 대표 Stevo Pearce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Stevo Pearce는 이후 Eistürzende Neubauten, Test Dept, Cabaret Voltaire를 비롯한 다양한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의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카바레 볼테르는 이후 뉴 오더와 친해지고, 댄스 음악 형태의 일렉트로팝과 유사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Christopherson은 1983년 Psychic TV를 떠나며 John Balance와 함께 Coil을 결성하고, 징(Gong)과 불로러(bullroarer : 오스트레일리아의 의식용 악기)를 통해 “화성의”, “동성애적 에너지”를 불러내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들의 친구였던 David Tibet은 Current 93을 결성한다. 두 그룹은 LSD와 암페타민에 큰 영향을 받았다. Coil의 공동 프로듀서였던 J. G. Thirlwell은 인더스트리얼에 블랙 코미디를 첨가한 장본인으로, 라운지에서 노이즈, 필름 뮤직 등의 다양한 음악을 차용하였다. 1980년대 초반 시카고의 Wax Trax!와 캐나다의 Nettwerk는 인더스트리얼 장르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더 접근하기 쉬운 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과 인더스트리얼 락으로 만듬으로써 장르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1980년대 초반 등장한 EBM은 이내 장르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1978년 크라프트베르크의 멤버 랄프 휘터가 처음 사용한 이 단어는 Front 242의 1984년 EP No Comment를 통해 다시 등장한 것을 계기로, Nitzer Ebb 을 비롯하여 Die Krupps, à;GRUMH…, Parade Ground, A Split-Second이 그 뒤를 따르며 장르화된다. 이 시대의 그룹들은 종종 반어법적 의도를 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을 추구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Front Line Assembly와 Ministry, Schnitt Acht같은 그룹은 전향적인 유럽 EBM을 구사하였으며, 특히 Revolting Cocks와 같은 밴드는 미국의 인더스트리얼 락과 EBM을 결합시켰으며 나인 인치 네일스의 데뷔 앨범 Pretty Hate Machine은 EBM과 인더스트리얼 락 등의 아이디어를 접목한 앨범으로써 그들에게 엄청난 성공을 안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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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stürzende Neubauten의 2007년 Concerto for Voice and Machinery 퍼포먼스. #

1984년 1월, Einstürzende Neubauten는 런던의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라는 곳에서 Concerto for Voice and Machinery 퍼포먼스를 통해 공연장 바닥에 드릴을 뚧었고, 결국 관객의 항의를 받아 영국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Test Dept, Laibach, Die Krupps 또한 Z'EV, SPK 등의 그룹은 인더스트리얼과 메탈의 사운드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이 중 Test Dept는 러시아 미래주의와 1984–1985년 일어난 영국 광부 파업을 지원하는 투어 활동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 Skinny Puppy는 인더스트리얼 선조들의 다양한 음악을 받아들인 독특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뉴욕의 포스트펑크 (Post Punk) 밴드 Swans는 스탠더드 락에 기반한, 하지만 메탈 음악의 미학을 실천하는 음악을 선보인 바도 있다. 슬로베니아의 그룹 Laibach는 스탈린주의, 나치, 티토주의, 다다이즘, 러시아 미래주의 심상 등에서 차용한 개념을 통해 유고슬라비아의 애국심과 독일의 권위주의를 융합시켰다는 점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이바흐를 옹호하며 그들과 그들의 Neue Slowenische Kunst (New Slovenian Art) 아트 그룹이 권위에 대한 과동일시(overidentification)를 시도함으로써 정부에 대해 파괴와 해방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인더스트리얼을 베이스로 한 다양한 형태의 분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노이즈앰비언트, 포크, 포스트 펑크 (Post Punk)와 EDM 등의 퓨전과 변화를 포함한 것으로써, 이 경향은 북미, 유럽, 일본 등으로 확산된다.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서브장르는 다크 앰비언트, 파워 일렉트로닉스, 제팬노이즈, 네오포크, 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 EBM, 인더스트리얼 메탈/락/힙합/팝, 먀셜 인더스트리얼, 파워 노이즈, 위치 하우스 등이 있다.

EBM은 특히 유럽의 언더그라운드 클럽 씬에서 유행하였으며 이 시기의 중요한 레이블을 꼽자면 벨기에의 PIAS Recordings와 Antler-Subway, 독일의 Zoth Ommog, 북미의 Wax Trax!, 스웨덴의 Energy Rekords 등이 있으며 중요한 아티스트로는 And One, Armageddon Dildos, Bigod 20, The Neon Judgement, Attrition 등이 있다. 1990년대 이후 많은 EBM 밴드들이 해체하거나 락, 메탈 등의 요소를 차용하며 자신들의 음악 색깔을 바꿔왔으며 1991년 Front 242가 발매한 Tyranny (For You)를 끝으로 EBM은 사실상 몰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유럽의 테크노가 EBM 사운드를 차용한 음악을 개발함으로써 명맥을 이어갔으며, 특히 퓨처팝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으로 인해 EBM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후기/현재 (NIN, Ministry 등의 흥행과 인더스트리얼의 변화)

1990년대 중반 나인 인치 네일스의 2집 앨범 “The Downward Spiral”의 대성공으로 인더스트리얼씬의 주류는 인더스트리얼 락이 차지하게 된다. 일렉트로 인더스트리얼도 크게 두가지 장르로 분화되었는데 하나는 다크 일렉트로고 또하나는 어그로테크였다. 90년대초에 나타난 다크 일렉트로는 스키니퍼피의 음악에서 영향을 크게받은 장르로서 음산한 분위기를 강조하는게 특징이였다. “yelworC”나 “Placebo Effect”같은 밴드들이 다크 일렉트로의 대표적인 밴드였다. 90년대 중반에 트랜스의 유행과 함께 어그로테크라는 장르도 나타났다. 어그로테크는 트랜스의 슈퍼쏘우 사운드를 일렉트로 인더스트리얼과 접목시켰다. “Funker Vogt”나 “Suicide Commando”등이 어그로테크의 대표적인 뮤지션이였다. 어그로테크는 레이브 열풍과 함께 일렉트로 인더스트리얼의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들속에서 수많은 인더스트리얼 뮤지션들은 인더스트리얼 록이나 어그로테크로 전향하였다. EBM씬은 테크노와 같은 타장르들과 결합해서 명목을 이어갔으며 순수한 EBM은 거의 사라졌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독일에서 안할트 EBM이 등장했다. 안할트 EBM은 80년대의 올드스쿨 EBM을 지향하는 장르였으며 독일내 언더그라운드 클럽씬에서 작지만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 장르

초기 인더스트리얼

스로빙 그릴스나 아인슈튀어첸데 노이바우텐 그리고 SPK 등이 들려주었던 해체주의적 인더스트리얼. 딱히 명확하게 정해진 형태는 없으며 무엇이든지 악기가 될 수 있다. 노이즈 인더스트리얼도 초기 인더스트리얼의 한 경향이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Throbbing Gristle, SPK, Einstürzende Neubauten, Esplendor Geometrico, Test Dept

마셜 인더스트리얼

라이바흐에 의해 만들어진 하위장르. 오케스트라의 적극적인 도입과 걸걸한 목소리등이 특징. 네오포크의 모태가 된 장르이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Laibach, Von Thronstahl, Parzival


일렉트로닉 바디 뮤직

일렉트로닉 바디 뮤직, EBM (Electronic Body Music) 혹은 Industrial dance이라고도 부른다. 인더스트리얼 뮤직과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신스펑크가 합쳐졌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Front 242, D.A.F, Nitzer Ebb , A Split-Second, Aghast View, Portion Control, Leaether Strip


안할트 EBM

21세기 들어서 독일에서 생긴 장르로서 D.A.F 스타일의 올드스쿨 EBM으로서의 회귀를 지향하는 장르.

대표적인 아티스트 : Blood Shot Eyes, Sturm Café, Frontal, Combat Company, U.M.M.


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

1980년대 중반 EBM과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운동에 의해 등장했다. 거친 비트와 왜곡되고 디지털화된 보컬 등을 특징으로 한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Skinny Puppy, Front Line Assembly, Haujobb, Yeht Mae, Mentallo and the Fixer


다크 일렉트로

1990년대 초에 개발된 하위 장르. 호러 음악의 샘플링과 으르렁 거리는 보컬 등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강조하는게 특징이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yelworC, Placebo Effect


어그로테크

1990년대 중후반쯤에 일렉트로-인더스트리얼의 하위 장르로써 등장함. 트랜스/하드스타일 계열의 슈퍼쏘우 사운드를 빌린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Aesthetic Perfection, Combichrist, Agonoize, Suicide Commando, Hocico, Funker Vogt


퓨처팝

신스팝과 트랜스, EBM의 4/4 드럼 패턴이 섞인 음악.

대표적인 아티스트 : VNV Nation, Apoptygma Berzerk, X-Marks the Pedwalk, Frozen Plasma, Blutengel


인더스트리얼 힙합

인더스트리얼과 브레이크 비트의 결합.

대표적인 아티스트 : Meat Beat Manifesto


다크 앰비언트

인더스트리얼과 앰비언트의 결합. 공포영화에 어울릴만한 음산한 분위기를 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Coil, Autopsia, Endura


파워 일렉트로닉스

초기 인더스트리얼, 혹은 노이즈 음악과 관련이 있는 장르. 피드백 된 스크래치 웨이브, 끽끽대는 높은 주파수의 사운드와 절규하는, 뒤틀린 가사 등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Whitehouse, Sutcliffe, Jügend, Ramleh


데스 인더스트리얼

하위 장르로써 밀집된 대기와 낮은 영역대의 드론 뮤직 등으로 이루어져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Brighter Death Now


인더스트리얼 락

인더스트리얼의 한 형태로써 기본적인 락의 형태에 화이트 노이즈나 컴퓨터 가상 악기 등을 이용한다.

대표적인 아티스트 : Nine Inch Nails, Sister Machine Gun, KMFDM, Julien-K


인더스트리얼 메탈

인더스트리얼 댄스 뮤직, 스래쉬 메탈, 하드코어 펑크 (Punk) 등이 결합된 형태.

대표적인 아티스트 : Ministry, Marilyn Manson, Die Krupps, White Zombie


사이버그라인드

21세기에 그라인드코어의 하위 장르로 등장함.

대표적인 아티스트 : Agoraphobic Nosebleed


Neue Deutsche Härte

독일의 락과 얼터너티브 메탈, 그루브 메탈과 하드 락이 뒤섞이고, 여기에 테크노와 일렉트로니카의 재료가 섞인 음악.

대표적인 아티스트 : Rammstein, Oomph!





;;;;;;;;;;;;



Electro-industrial 



Ehttp://en.wikipedia.org/wiki/Electro-industrial 


http://industrial.org/

http://www.discogs.com/Frontline-Assembly-Epitaph/master/12434





allmusic.com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22:33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
피트 시거를 위한 변명 혹은 추모



2011년 싸늘한 뉴욕의 10월 밤 백발의 한 노인이 기타를 손에 들고 맨해튼의 무대에 올랐다. 무대 주위에는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금융자본의 탐욕에 항거하여 ‘월가 점령’을 외치며 몰려든 시민들로 가득했다.

그 노인은 늙고 가녀린 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하지만 그의 노쇠한 성대는 이미 이전과 같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진동을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 채, 금세 젊은이들의 노래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힘찬 기타의 울림만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무대에 서겠다는 노장의 의지를 뜨겁게 전하고 있다. 그의 노래 소리는 아마도 추운 밤, 앞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투쟁에 지쳐있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온기를 전했음이 틀림없다.

이 할아버지는, 바로 며칠 전 길고 긴 인생길의 마지막을 접고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대표적 포크 가수인 피트 시거(Pete Seeger, 1919-2014)이다.

그의 길고 긴 음악 인생을 돌아보면, 노동운동, 공민권운동에서 베트남 반전운동, 환경운동을 거쳐 월가 점령 시위까지 현대 미국의 민중저항사는 그의 노래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민요를 연구하고 이를 도시민들에게 소개하던 이 포크 가수는 왜 저항가요 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시거에 의해서 대중화된 오랜 가스펠송 <We Shall Overcome>은 왜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두에 미국에서 개시되었고 이후 세계 각지의 민중가요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 ‘포크 리바이벌’ 운동 즉 민요 부흥 운동이 있었다.

포크 리바이벌 운동은 본래 미국 북동부에 전해지는 영국에서 기원하는 민요 같은 전통가요를 발굴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전통가요의 레퍼토리나 스타일을 공민권운동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과 결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운동 초기의 가수로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를 들 수 있고, 1950년대 후반 이후 운동의 고양기와 상업적인 성공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피트 시거나 존 바에즈(Joan Baez, 1941-), 혹은 나중에 록으로 전환하여 포크 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밥 딜런(Bob Dylan, 1941-) 등이 있다.

이들은 어쿠스틱 기타나 전통악기만을 사용하는 연주법을 고집하여 전자악기의 사용에 저항했으며, 민요를 발굴하고 연구하기도 했던 관계로,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현하는 운동으로 오해되어, 특히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꺼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애국자’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그들의 운동도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아이덴티티 형성을 목표로 ‘포클로어’(Folklore)에 주목한 19세기식 국민적 낭만주의 열풍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그들이 주로 소개한 민요들은 체제가 주목하지 않거나 혹은 체제가 억압했던, 정치적 권위에 저항하고 전쟁을 비판하고, 농촌의 피폐상을 노래한 곡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민중 저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림으로써 새로운 정치운동의 기점을 마련해 갔으며, 계급적 시각의 노동운동과도 연계하여 사회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급진적 노동운동 조직으로 유명한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의 운동가요집 Little Red Songbook 수록곡들은 그들이 애창했던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iww 노래집

IWW 노래모음집의 표지

이렇게 민요의 주체로서 민중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전통성 못지않게 정치성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이전의 국수주의적인 민요부흥운동과 이들의 음악운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피트 시거 자신도 40년대에 미국공산당(CPUSA)의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그로 인해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소환되기도 하여 오랫동안 미디어의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평생 반공세력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국수주의적 민요부흥운동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레퍼토리에 왕성하게 추가되었던 것이 미국이나 영국 태생의 곡 못지않게 타문화권의 전통가요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2009년의 인터뷰에서 시거가 “내 직업은, 세상에는 좋은 음악이 많이 있고 그것이 잘 활용된다면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듯이, 그들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 약자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노래로 대변함으로써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존 바에즈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나 도나(Donna Donna)>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운명을 노래한 동구 유대인들의 이디쉬(Yiddish) 노래에서 기원한 곡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시거가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민요에는 쿠바의 농민가요인 <관타나메라(Guantanamera)>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자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의 시를 대입하여 호세이토 페르난데스(Joseíto Fernández, 1908-1979)가 편곡한 버전이다.

가사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con los pobres de la tierra) 나는 나의 운명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다.

시거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1963년은 마침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 직후였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이 쿠바혁명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대항하여 일체감을 추구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지향은 마르티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거는 쿠바의 민중가요를 자신의 레퍼토리에 적극적으로 추가하면서 반제, 반전평화 운동을 노래로써 확산시켰던 것이다.

혹은 시거의 대표곡이자 대표적인 반전가라고 할 수 있는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1961)는, 소련 작가 숄로호프(Mikhail Sholokhov, 1905-1984)의 소설 [고요한 돈강]에 인용된 코사크 민요 “꽃은 다 어디로 갔나? 소녀들이 다 꺾었지/ 그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녀들은 다 결혼했지/ 그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다 군대에 갔지”라는 가사에 촉발되어 만들어 진 것이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어 “언제쯤이면 그들은, 우리들은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달을까”라는 메시지를 가진 반전가로 세계적으로 퍼져갔다.

특히 독일어 버전이 유명했으며, 피트 시거의 영향은 독일의 68년 ‘성난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된 포크 리바이벌 운동에도 미쳤다. 피트 시거 자신도 동서독을 오가면서 음악가들과 교류했으며, 나치의 양심수 수용소에서 만들어진 저항가인 <늪지의 병사들(Die Moorsoldaten)>을 불러 국제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서 피트 시거하면, <아리랑(Ariran)>(1953 혹은 1954)을 부른 서구의 가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미국의 포크가수가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에만 경탄하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정작 그가 부른 그 <아리랑>이 어떤 <아리랑>이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아니다. 그것은 3.1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과 조선 민족해방운동을 결합시키고자 진력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님 웨일즈와 함께 작성한 자신의 회고록 [아리랑: 조선이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1941)의 서두에서 소개한 그 <아리랑>이다.

시거는 이 책에 기초하여 <아리랑>이 조선 왕조의 폭정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죽음으로써 저항하는 희생정신의 노래라는 걸 소개하며 분단의 역사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김산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한국에서는 오래도록 금서로 있다가 1984년에 비로소 번역소개된 것을 떠올리면, 시거가 저항가요로서의 <아리랑>을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일부 국내 언론이 시거가 한국전쟁 참전시에 <아리랑>을 들었다고 한 것은 오보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추구한 ‘포크 리바이벌’이라는 것은, 다양성과 정치성을 추구하며 위로부터의 전통에 저항하는 ‘민중의 전통’ 구축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반제, 반전, 반자본적 계급 지향성이 뚜렷했으며, 시거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했던 노래”를 민중운동 속에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권력과의 긴장관계이며, 그것이 느슨해지는 순간, 그는 하염없이 ‘애국자’의 길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시거가 만년에 국가로부터의 각종 표창을 받고 오바마 대통령 취임 콘서트에서 노래했을 때, 그는 허드슨 강의 정화운동에 헌신하고 전통을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한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기억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를 국민의 역사 속으로 회수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포크 리바이벌 운동을 탈환하고자 한다면, 시거가 일관되게 견지했던 탈국가적 계급 지향성을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환경적 정의는 경제적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 환경주의자 시거의 “말”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가 부른 <이 땅은 당신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이 조국 찬미의 노래가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읊은 곡이었다는 그의 “노래 정신”이 묻히지 않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에 믿었던 것은 “노래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 했다”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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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우크 송에는 작자불명의 옛 민요*와, 그 소박한 가곡형식과 정신을 근거로 삼은 현대의 포우크 송이 있으며, 여기서는 미국의 후자, 이른바 모던 포우크 송, 컨템퍼러리 포우크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의 이민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이 나라에는 영국을 주로 한 유럽 각국 민요의 가사를 바꾼 발라드나 흑인이 비참한 생활을 호소한 것 등이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레코드의 보급과 함께 흑인의 블루스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취입이 매출되는 동시에 존 및 앨런 로맥스 등에 의한 조사 채집도 실시되고, 거기에 자극받아 민요연구가 · 가수의 소박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트 시거는 흑인 포우크 블루스 가수 레드베리와 불황시대의 미국을 노래한 우디 거슬리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자작곡에 의해 우경화(右傾化) 해 온 미국정부며 인종차별에의 저항,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포우크 운동에 정진, 19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나 시민권운동과도 결부된 포우크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존 바에즈를 비롯, 로크 이디엄을 살린 봅 딜런은 그 대표적인 가수, 싱거=송 라이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크 송 [folk song] (파퓰러음악용어사전, 클래식음악용어사전, 2002.1.28,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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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s's 초 

모던 포크음악의 선구자, 피터 폴 & 메리
맑은 멜로디와 날카로운 진보적 성향의 가사로 인기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미국 포크음악의 대중적 효시라고 불리는 피터 폴 & 메리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입술에 닿기만 해도 절로 녹아내리는 달콤한 솜사탕처럼, 그들의 노래는 한 편의 동화이자 할머니가 손자를 재우면서 불러 주시는 자장가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 포크음악계를 석권했던 당시의 시대를 돌아보면 사정이 동화처럼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피터 폴 & 메리는 미국 전역에서 반전과 저항이라는 홍역을 앓던 60~70년대에 대중성과 저항성의 경계에서 모두를 아우르는 백인 취향의 깨끗하고 맑은 멜로디와 날카로운 진보적 성향의 가사로 미국 모던 포크의 중심에 서있던 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들은 베트남전, 흑인민권운동, 히피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미국사회의 양심과 아픔을 아름답고도 애잔한 선율로 표현했던 그룹이다.



 



1961년 미국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마을에 살던 피터 야로우, 노엘 폴 스투키, 그리고 메리 트레버스 세 사람의 만남은 포크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연예활동을 하며 포크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 셋은 혼성 트리오를 만드는 일에 합의해 그룹 이름을 멤버 각자의 이름에서 고유명사를 하나씩 합친 ‘피터 폴 & 메리’가 탄생하게 된다.



 



홍일점인 메리가 리드보컬을, 나머지 둘은 백 보컬을 맡았는데, 데뷔 초기에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 나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포크음악의 대가 밥 딜런의 매니저였던 앨버트 그로스먼이 이들의 공연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목표했던 메이저 무대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다.



 



그로스먼의 후원으로 1962년 첫 앨범 ‘Peter Paul & Mary’가 발표되는데, 이 앨범에 들어있는 ‘If I Had a Hammer’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망치로 위험을 제거하고 종을 울리며 모든 동포를 위해 노래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당시 저명한 가수 피트 시거에 의해 작곡된 이 작품은 빌보드 싱글차트 10위로 상승하면서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 유명한 올드 포크 넘버인 ‘레몬 트리’도 데뷔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고 이 역시 차트 12위에 오르면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데뷔 앨범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그들은 두 번째 앨범 ‘Moving’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포크의 영원한 명곡인 ‘(Puff)The Magic Dragon’이 탄생했는데, 동화적인 분위기를 절로 연상케 하는 더없이 감미로운 이 곡은 당시 ‘Puff’라는 단어가 마리화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uff’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은 세 번째 앨범인‘In the wind’에서는 밥 딜런이 작곡한 포크의 명작‘Blowin' In The Wind’를 그들만의 하모니로 리메이크함으로써 가공할 만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자칫했으면 포크의 역사에서 묻혀버릴 뻔 했던 피트 시거의 If I Had a Hammer나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도 대중적으로 사랑받으며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피터 폴 앤 메리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리메이크한 포크의 숨겨진 고전들은 모두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피터 폴 & 메리의 모던 포크의 재해석 능력은 대단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Lemon Tree, 500Miles, Puff, The Magic Dragon, Gone the Rainbow, Blowin' In The Wind, 존 덴버의 곡 Leavin On A Jetplane 등 수많은 자작곡과 리메이크 곡들을 차례로 히트시키면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혼성 트리오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피터 폴 & 메리는 음악적 성공에 머무르며 결코 안일한 스타의 삶을 영위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민권 운동에 참가하여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고, 월남전 반대 시위에도 그들은 기타와 목소리를 가지고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로 인해 피트 시거의 곡 If I Had A Hammer는 시민운동의 성가로 각지의 집회에서 불려 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피터 폴 앤 메리는 사회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반전과 평화와 자유를 외치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아티스트로써 그들의 유명세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공연 활동과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로, 지난 2003년에는 나이가 많이 들어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한 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 모습을 표지로 한 앨범 ‘In These Times’를 선보였다.



 



피터 폴 & 메리는 1961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결성되어 1970년 해체되고 재결성되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지금까지 불리어지는 수많은 포크 명곡을 양산해낸 밴드로 팝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밴드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posted by 人心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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