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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9:29

http://en.wikipedia.org/wiki/Folk_music_of_England#The_early_19th_century











posted by 人心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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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8:45

밥 딜런

Bob_Dylan_in_Toronto1.jpg

1980년 토론토 공연에서.


2012년 모습.

Contents

1. 개요
2. 삶
2.1. 초기
2.2. 전설을 쓰다
2.3. 암흑기와 재기
3. 기타 등등
4. 디스코그래피

1. 개요 

Bob Dylan. (1941년 5월 24일~)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화가이다.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와 음악적 성과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대중 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이끌어올린 사람',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 인물' 등의 평가를 받는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Robert Allen Zimmerman). 지금 이름인 딜런[1]은 잘 알다시피 시인 딜런 토머스에서 왔다.[2]

2. 삶 

2.1. 초기 

러시아계 유대인[3]으로, 1941년 미네소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블루스와 모던 포크의 대가 우디 거스리, 엘비스 프레슬리(+ 초기 로큰롤)의 광팬이였던 그는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해 근처에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2.2. 전설을 쓰다 

대학 1학년 말에 퇴학을 당했고, 1961년 뉴욕으로 올라왔다. 그는 카페에서 반주를 하고 간간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이때 그는 우디 거스리의 병실을 찾아가 그를 간병하면서 초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아직 그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앨범이었다.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The Freewheelin’Bob Dylan" [4]앨범이였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 음악적으로는 아직 통기타가 주가 되는 포크이다 보니 이후 앨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심한 경향이 있다. 여튼 Blowin' in the wind나 Don't think twice , it's all right[5]같은 명곡들이 즐비한 명반.

이 앨범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밥 딜런이 되고자 했다. 김민기도 그 중 하나. 하지만 그는 곧 심심한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리게 된다. 그리고 신은 딜런에게 비틀즈를 선사하셨다. 반대로 그리고 신은 비틀즈에게 딜런을 선사하셨다도 성립되는데 그 이유는 아래서 설명하겠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비틀즈, 특히 존 레논은 딜런의 심도있는 가사와 대마초에 열광하게 됐고, 딜런은 비틀즈에게서 로큰롤의 환희를 발견했다.[6] 비틀즈는 딜런의 영향을 받아 러버 소울을 발표하게 됐고, 딜런은 후배 밴드인 버즈(Byrds)Buzz와는 다르다! Buzz와는!의 'Mr. Tambourine Man'과[7] 자신의 앨범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통해 록을포풍 랩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본격적으로 포크 록에 도전하게 된다.

정통 록에서 트로트로 변신하는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포크 씬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가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전기 기타를 드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이 날 록 역사에서 길이 남을 라이브 공연이 벌어졌다. "Like a Rolling Stone" 이 때 영상을 보면 밥 딜런이 전기기타를 든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와중에도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며 쓰레기를 던져댄다. 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Highway 61 Revisited"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밥 딜런과 대중 음악의 시금석이 된 작품이다. 우선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간보기를 했던 포크 록을 본격적으로 완성시켰으며,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8]고 말했다. 수록곡 'Like a Rolling Stone'은 6분이라는 파격적인 곡 길이와 비의적이지만 신랄한 가사, 당시로써는 복잡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싱글 차트 2위에 올라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인간적으로 명반 행렬이 지나쳤던 1960년대 밥 딜런 커리어 중에서도 2번째 앨범 "The Freewheelin’Bob Dylan"과 함께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다.

1966년에 발표한 "Blonde on Blonde" 역시 큰 찬사를 받았고, 작품성으로는 그의 정점이라 평해진다. 밥 딜런은 저 세 장의 앨범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앨범 발표 뒤,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크게 다친 그는 잠시 세간의 눈을 피해 요양하게 된다. 이는 사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과 짠 계획이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딜런은 그로스먼과 신비주의 전략(과 가정)을 위하여 일부러 크게 다쳤다고 발표하기로 하고, 그가 다쳤단 소식이 들리자 딜런의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흠좀무.

복귀 이후 그는 히피 운동이 한창이였던 1960년대 말을 "John Wesley Harding", "Nashville Skyline", "The Basement Tapes"[9]같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어쿠스틱과 컨트리에 집중하는 인상을 보였다. 이렇게 대중과 평자의 기대와 어긋나는 행보에 미묘한 반응을 얻던 차에 이혼 직후인 1975년 발표된 'Blood on The Tracks'으로 수 많은 이들에게 '역시 밥 딜런' 찬사를 받았다. 이 앨범은 쟁쟁한 밥 딜런의 명반 사이에 당당히 끼어있다. 하지만 이 앨범과 'Desire'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한다. 바로 종교였다.

2.3. 암흑기와 재기 

1970년대 말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밥 딜런은 1979년 Slow Train Coming이라는 가스펠 음반을 내놨으며 그래미 상도 타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보다는 덜한-사실 6-70년대 시절에 밥 딜런은 웬만한 걸그룹이나 탑스타 뺨치는 수준이였다.-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정규적인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허나 발표한 앨범들의 퀄리티가 전성기보다 못해서 이 시절은 그의 암흑기로 불린다. 정확히 콕 찝어 말하자면 백 밴드 나두고 당대 유행인 뉴웨이브를 어정쩡한 도입하려고 했다가 안 좋은 평을 받았다고. 그 와중에 기억될 만한 음악적 경력을 꼽자면 미국의 유명 뮤지션 25명이 녹음한 자선음반인 We Are The World의 녹음 참가 정도... 그래도 별다른 휴지기 없이 꾸준히 공연 돌고 반전 운동에 참여하긴 했다. 별로 눈에 안 띄는데다 상대적으로 걸작이라 할만한 앨범이 없어서 그렇지.

여튼 1989년 'Oh Mercy'로 지금까지의 어정쩡함을 버리고 재기의 가능성을 내비친 그는 1997년 'Time Out of Mind'로 확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3~5년 터울로 꾸준히 음반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ex.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안 어울리게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도 냈다. (...) 그런데

이런 에로 오야지

정작 음반평은 별로라는듯.

3. 기타 등등 

가사 쓰는 능력에도 봤듯이 글과 말을 굉장히 잘쓰기로 유명했으며,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였으며, 이런 아웃사이더적인 행동은 수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밥 딜런을 행동 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꽤 유명하다.) 다만 이런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대중음악의 노랫말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1990년대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차레 올랐다. 뮤지션으론 유일하다. 특히 2004년의 경우 수상에 상당히 근접했던걸로 알려져있다. 결국 상은 못탔지만, 노벨문학상의 성격에 관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조용하다가 2012년에 다시 후보에 오른것으로 알려졌다.[10]

1960~70년대에는 사회 유명인사였지만[11], 최근 20대 경관에게 노숙자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줄 알았지 하지만 경관은 내 말을 듣지 않았어

90년대 초반에는 애플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듣었다...

비록 번안된 'Blowin' in the wind'[12]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참고로 김광석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도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번안한것이다

어째 점점 나이가 들수록 미노년 간지로 진화하는 중이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가창력은 그저 그런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목소리가 나쁘다. 성량이 부족하고 웅얼웅얼거리며 부르는 노래는 위악적 가창이라 부를만 하다. 하지만 독특한 창법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가수들이 많은데 리메이크 가수의 목소리로 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밥 딜런의 원곡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였던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13] 올리비아 뉴튼존이 부른 'If Not For You'를 들어보시라. 정말 아름다운 노래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밥 딜런의 원곡은.....[14] 
근데, 2012년에 발매된 앨범인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 충공깽


부랑자를 연상시키는 겉모습과는 달리 부동산을 여러 개 소유한 부자인데다 개인주의자라 한대수와 같이 '쇼 비지니스를 이용할 줄 아는 가식쟁이'라며 까거나 싫어하는 포크 뮤지션들이 제법 있는 듯 하다. 오히려 더욱 진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닐 영을 그보다 한 수 위로 쳐주는 정도... 사생활 면에서도 평가는 안 좋다. 여성편력이 매우 심해서 이 여자 저 여자 돈 띠어주는라 열심히 돈 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니.. 예전 여친들인 조안 바에즈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들어도 뭐...

2010년 03월 31일 잠실운동장에서 내한공연 하신다. 올레!

참고로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 쓰인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콥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락 밴드 The Wallflowers의 리더로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 하지만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이 양반이 뭐길래 이리 유명한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임진모씨의 평을 읽어보면 좋다.

4. 디스코그래피 

연도제목
1962Bob Dylan
1963The Freewheelin' Bob Dylan
1964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Another Side of Bob Dylan
1965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Highway 61 Revisited
1966Blonde on Blonde
1967John Wesley Harding
1969Nashville Skyline
1970Self Portrait
1970New Morning
1973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Dylan
1974Planet Waves
1975Blood on the Tracks
1975The Basement Tapes
1976Desire
1978Street Legal
1979Slow Train Coming
1980Saved
1981Shot of Love
1983Infidels
1985Empire Burlesque
1986Knocked Out Loaded
1988Down in the Groove
1989Oh Mercy
1990Under the Red Sky
1992Good as I Been to You
1993World Gone Wrong
1997Time Out of Mind
2001Love and Theft
2006Modern Times
2009Together Through Life
2009Christmas in the Heart
2012Tempest

https://mirror.enha.kr/wiki/%EB%B0%A5%20%EB%94%9C%EB%9F%B0

posted by 人心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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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6:4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703&cid=272&categoryId=272

 

http://en.wikipedia.org/wiki/Lyrics


 가사   



포크송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포크송(folksong)이란 한국어의 '민요'에 해당하는 말이나, 

뉘앙스가 좀 다르다. 보통 포크송이라 하는 경우에는 러시아 민요,

 이탈리아 민요 등은 포함하지 않으며 미국 캐나다의 

민요와 미국에 대한 영국(잉글랜드)계 민요 등, 

앵글로색슨 국가의 민요를 가리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단, 미국이나 캐나다 원주민들의 음악은 제외한다. 

이러한 음악은 월드뮤직이지 포크가 아니다. 

잉글랜드 민요가 미국 민요에 영향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민요도 포함하는 것이다. 비영어권 국가의 민요는 

월드뮤직으로 분류한다. 그것도 전승적인 옛 민요와 

새로운 창작민요를 모두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목차

종류[편집]

트래디셔널송[편집]

포크송 가운데서 민중의 입과 귀로 전해 내려오는 

작자 불명의 것을 '트래디셔널 포크송' 또는 

'트래디셔널송'(Traditional song)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선 '전승민요(傳承民謠)'라 한다. 

민요란 말을 엄밀한 뜻으로 쓸 때에는 

'트래디셔널송'과 같은 뜻이 된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중 하나가 발라드이다. 

발라드란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문체로 되어 있는 고전 포크송을 뜻한다.

미국에서 가장 트래디셔널 포크송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는 곳이 

애팔래치아 산맥 지방의 남반부인데, 일반적으로 이 지역을 '서던 마운틴'(Southern Mountain)이라 부르고 있다. 주 이름으로 말하면 켄터키 주 테네시 주의 동부와 버지니아 주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서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서북단, 조지아 주의 북단이 포함된다. 또 캔자스 주 오클라호마 주에 걸치는 오자크 대지를 서던 마운틴에 넣는 사람도 있다. 이 지역은 미국에서 가장 개발이 늦은 농촌지대로서 이른바 '푸어 화이트'(Poor white)의 집합소로 변하고 있으나, 이 곳 주민들은 초기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와서 이 산악지대에 대대로 정착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게다가 교통이 불편하여 외부와의 접촉이 적기 때문에 조상이 유럽에서 가져온 민요를 끊임없이 전하고 있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대표하는 곡은 다음과 같다. 한글 발음-뜻-알파벳 표기-국적 순으로 나열했다.

  • 셰넌도아-셰넌도아-Shennandoah-미국
  • 블로 이 윈즈-바람아, 불어라-Blow, Ye Winds-미국
  • 홀 어웨이 조-당겨라, 조야-Haul Away Joe-미국
  • 문샤이너-밀수 업자-Moonshiner-미국
  • 양키 두들-미국인 하찮은 것-Yankee Doodle-미국
  • 블랙 이즈 더 컬러 어브 마이 러브스 헤어-내 사랑의 머리카락 색깔은 검은색이다-Black is the Color of My Loves Hair-미국[1]
  • 페기 고든-페기 고든-Peggy Gordon-캐나다[2]
  • 뱅크스 어브 뉴펀들랜드-뉴펀들랜드의 둑-Banks of Newfoundland-캐나다
  • 그린슬리브즈-초록빛 소매-Greensleeves-잉글랜드
  • 리빙 어브 리버풀-리버풀 떠나기-Leaving of Liverpool-잉글랜드
  • 더 워터 이즈 와이드-바다가 넓다-The Water is Wide-잉글랜드
  • 스카보로 페어-스카보로 시장-Scarborough Fair-잉글랜드
  • 머메이드-인어-Mermaid-잉글랜드
  • 뱅크스 어브 더 스위트 프림로지스-향기로운 앵초가 핀 둑-Banks of the Sweet Primroses-잉글랜드
  • 로즈 어브 알렌데일-알렌데일의 장미꽃-Rose of Allendale-잉글랜드(찰스 제프리스(Charles Jeffreys) 작사, 시드니 넬슨(Sidney Nelson) 작곡)
  • 올 퍼 미 그로그-모두 내 그로그(칵테일 종류)를 위해-All for me Grog-잉글랜드
  • 이즌 잇 그랜드 보이스-소년들이여, 대단하지 않은가?-Isn't it grand, Boys?-잉글랜드
  • 대니 보이-소년 대니-Danny Boy-잉글랜드(프레드릭 웨덜리 작사, 전통 가락)
  • 월칭 마틸다-왈츠를 추는 마틸다-Waltzing Matilda-호주(밴조 패터슨)[3]
  •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남 호주-South Australia-호주

셀틱 포크송[편집]

켈트족 국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포크 음악이다. 그냥 '포크' 라고 하는 경우에는 미국, 캐나다, 잉글랜드 등, 앵글로색슨 문화가 강세인 지역의 고전 포크송을 가리킨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도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이 두 나라의 포크 음악은 포크로 분류한다. 그러나 민족이 켈트족으로 완전히 다르고, 따라서 '켈트 문화권' 이라는 한 문화권을 형성하기 때문에 별도로 아일랜드 포크, 스코틀랜드 포크로 분류한다. 그러나 같은 켈트 문화권이라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켈트 음악은 월드뮤직으로 분류한다. 민족적 성격이 강하며, 미국 포크에서 사용되는 악기 가운데 리코더 틴 휘슬로, 드럼 보란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자세한 내용은 스코틀랜드의 포크 음악,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 참조.

모던 포크송[편집]

모던 포크송(Modern Folksong)은 '트래디셔널송'에 대하여 민요풍인 창작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트래디셔널송을 편곡하여 새로운 감각으로 처리한 것도 포함하는 수가 많다. 신작 민요나 새 감각으로 편곡된 민요를 전문으로 노래하는 사람을 '모던 포크 싱어'라 부르고 있으며, 피트 시거, 존 바에즈, 밥 딜런 등등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대표하는 곡은 다음과 같다. 한글 발음-뜻-알파벳 표기-국적(작곡자) 순으로 나열했다.

  • 웨어 해브 올 더 플라워스 건-꽃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미국(피트 시거, 조 하이커슨)
  • 이프 아이 해드 어 해머-만일 내가 망치를 갖고 있다면-If I Had a Hammer-미국(피트 시거, 리 헤이스)
  • 웬 더 십 컴스 인-배가 들어올 때에-When the Ship Comes In-미국(밥 딜런)
  • 램블링 갬블링 윌리-떠돌아다니며 도박하는 윌리-Rambling, Gambling Willie-미국(밥 딜런)[4]
  • 레스틀리스 페어웰-쉴 틈 없는 이별-Restless Farewell-미국(밥 딜런)[5]
  • 블로잉 인 더 윈드-부는 바람-Blowing in the Wind-미국(밥 딜런)
  • 다이아몬즈 앤 러스트-다이아몬드와 녹슨 철-Diamonds and Rust-미국(존 바에즈)
  • 더치맨-네덜란드 사람-Dutchman-미국(마이클 피터 스미스)
  • 위 섈 오버컴-우리는 극복할 것이다-We Shall Overcome-미국(찰스 앨버트 틴들리(Charles Albert Tindley)의 원곡을 약간 변형)
  • 스트레인지스트 드림-가장 이상한 꿈-Strangest Dream-미국(에드 맥커디(Ed McCurdy))
  • 어 플레이스 인 더 콰이어-합창단의 한 자리-A Place In The Choir-미국(빌 스테인스(Bill Staines))
  • 로저빌 페어-로저빌 시장-Roseville Fair-미국(빌 스테인스)
  • 앤 더 밴드 플레이드 월칭 마틸다-And the Band Played Waltzing Matilda-호주(에릭 보글(Eric Bogle))
  • 노 맨스 랜드/그린 필즈 어브 프랜스/윌리 맥브라이드-No Man's Land/Green Fields of France/Willie McBride-아무도 없는 땅/프랑스의 푸른 벌판/윌리 맥브라이드-호주(에릭 보글)[6]
  • 스트리츠 어브 런던-런던 거리-Streets of London-잉글랜드(랄프 맥텔(Ralph McTell)
  • 피들러스 그린-천국-Fiddler's Green(존 코놀리(John Conolly))
  • 바레츠 프라이비티어스-바렛의 사나포선-Barret's Privateers-캐나다(스탠 로저스(Stan Rogers))
  • 메리 엘렌 카터-메리 엘렌 카터-Mary Ellen Carter-캐나다(스탠 로저스)
  • 얼리 모닝 레인-이른 아침 비-Early Morning Rain-캐나다(고든 라이트풋)
  • 토크 투 미 어브 멘도시노-멘도시노에게 내 얘기를 해 줘요-Talk to me of Mendocino-캐나다(케이트 맥가리글(Kate McGarrigle))

프로테스트송[편집]

프로테스트송(Protest song)은 사회적인 문제를 들어 항의하는 노래, 전쟁 반대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노래로부터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표현방법도 항의의사를 그대로 표명하는 연설조의 것에서부터 유머 감각으로 넌지시 공격하는 풍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이다. 또 사회악과 싸우는 결의를 표명한 노래도 보통 프로테스트 송에 들어 있다. 대표적인 곡들은 모던 포크송 리스트에 함께 나열되어 있다.

포크록[편집]

포크록(Folkrock)은 포크송 적인 감각을 가진 로큰롤을 말한다. 1965년에 <미스터 탬버린 맨>이 히트한 이래, 이러한 스타일이 널리 시도되기에 이르렀다. 보통 포크는 기타, 밴조, 리코더, 하모니카, 콘서티나, 아코디언, 만돌린, 바이올린, 세트 형태가 아닌 한 개의드럼을 사용하는 반면, 포크록은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신시사이저를 쓰고 드럼 세트로 록 비트를 붙인다. 1967년경부터 사이케데릭 사운드 등 여러 가지 신종 록의 움직임이 왕성해짐에 따라 포크록도 그 안에 흡수된 것 같으며, 그 뒤로 이 말은 그리 쓰이지 않게 되었다.

포크송과 관련된 미국의 음악[편집]

발라드[편집]

블루스[편집]

미국 흑인의 포크송의 일종이다. 절망적인 심경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며, 12마디 단위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흑인영가[편집]

이른바 '니그로 스피리추얼(Negro spirituals)'을 말한다. 미국 흑인의 포크송 중 기독교 신앙을 노래한 것이다.

가스펠 송[편집]

백인의 종교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흑인영가의 일종을 의미한다. 1940년대에 일어난 새로운 형의 흑인영가로서, 재즈적 리듬을 가진 부르짖는 듯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일이 많다.

후테나니[편집]

후테나니(Hootenanny)는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즐기는 단란한 느낌의 포크송 집회를 말한다. 또 305종 하나하나에 차일드가 붙인 정리번호는 '차일드 번호'라 하여 지금도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유명한 <바바라 알렌>은 차일드 84번이다.

참고 자료[편집]

주석[편집]

  1. 이동 스코틀랜드계 미국 민요로 추정된다.
  2. 이동 스코틀랜드계 캐나다 민요로 추정된다.
  3. 이동 과거에는 호주의 비공식 국가였다.
  4. 이동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브레넌 온 더 모어를 미국 버전으로 패러디한 곡이다. 밥 딜런은 더 클랜시 브라더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5. 이동 아일랜드 고전 포크송 파팅 글래스를 패러디한 곡이다.
  6. 이동 에릭 보글의 앨범에는 노 맨스 랜드, 더 코리스와 더 퓨리스(The Fureys), 더 클랜시 브라더스의 앨범에는 그린 필즈 어브 프랑스, 그리고 메이컴 앤드 클랜시의 앨범에는 윌리 맥브라이드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바깥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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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
피트 시거를 위한 변명 혹은 추모



2011년 싸늘한 뉴욕의 10월 밤 백발의 한 노인이 기타를 손에 들고 맨해튼의 무대에 올랐다. 무대 주위에는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금융자본의 탐욕에 항거하여 ‘월가 점령’을 외치며 몰려든 시민들로 가득했다.

그 노인은 늙고 가녀린 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하지만 그의 노쇠한 성대는 이미 이전과 같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진동을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 채, 금세 젊은이들의 노래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힘찬 기타의 울림만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무대에 서겠다는 노장의 의지를 뜨겁게 전하고 있다. 그의 노래 소리는 아마도 추운 밤, 앞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투쟁에 지쳐있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온기를 전했음이 틀림없다.

이 할아버지는, 바로 며칠 전 길고 긴 인생길의 마지막을 접고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대표적 포크 가수인 피트 시거(Pete Seeger, 1919-2014)이다.

그의 길고 긴 음악 인생을 돌아보면, 노동운동, 공민권운동에서 베트남 반전운동, 환경운동을 거쳐 월가 점령 시위까지 현대 미국의 민중저항사는 그의 노래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민요를 연구하고 이를 도시민들에게 소개하던 이 포크 가수는 왜 저항가요 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시거에 의해서 대중화된 오랜 가스펠송 <We Shall Overcome>은 왜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두에 미국에서 개시되었고 이후 세계 각지의 민중가요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 ‘포크 리바이벌’ 운동 즉 민요 부흥 운동이 있었다.

포크 리바이벌 운동은 본래 미국 북동부에 전해지는 영국에서 기원하는 민요 같은 전통가요를 발굴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전통가요의 레퍼토리나 스타일을 공민권운동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과 결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운동 초기의 가수로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를 들 수 있고, 1950년대 후반 이후 운동의 고양기와 상업적인 성공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피트 시거나 존 바에즈(Joan Baez, 1941-), 혹은 나중에 록으로 전환하여 포크 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밥 딜런(Bob Dylan, 1941-) 등이 있다.

이들은 어쿠스틱 기타나 전통악기만을 사용하는 연주법을 고집하여 전자악기의 사용에 저항했으며, 민요를 발굴하고 연구하기도 했던 관계로,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현하는 운동으로 오해되어, 특히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꺼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애국자’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그들의 운동도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아이덴티티 형성을 목표로 ‘포클로어’(Folklore)에 주목한 19세기식 국민적 낭만주의 열풍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그들이 주로 소개한 민요들은 체제가 주목하지 않거나 혹은 체제가 억압했던, 정치적 권위에 저항하고 전쟁을 비판하고, 농촌의 피폐상을 노래한 곡들이었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민중 저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림으로써 새로운 정치운동의 기점을 마련해 갔으며, 계급적 시각의 노동운동과도 연계하여 사회변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급진적 노동운동 조직으로 유명한 세계산업노동조합(IWW)의 운동가요집 Little Red Songbook 수록곡들은 그들이 애창했던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iww 노래집

IWW 노래모음집의 표지

이렇게 민요의 주체로서 민중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전통성 못지않게 정치성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이전의 국수주의적인 민요부흥운동과 이들의 음악운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피트 시거 자신도 40년대에 미국공산당(CPUSA)의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그로 인해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소환되기도 하여 오랫동안 미디어의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평생 반공세력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국수주의적 민요부흥운동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레퍼토리에 왕성하게 추가되었던 것이 미국이나 영국 태생의 곡 못지않게 타문화권의 전통가요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2009년의 인터뷰에서 시거가 “내 직업은, 세상에는 좋은 음악이 많이 있고 그것이 잘 활용된다면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듯이, 그들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 약자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노래로 대변함으로써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존 바에즈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나 도나(Donna Donna)>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운명을 노래한 동구 유대인들의 이디쉬(Yiddish) 노래에서 기원한 곡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시거가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민요에는 쿠바의 농민가요인 <관타나메라(Guantanamera)>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자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의 시를 대입하여 호세이토 페르난데스(Joseíto Fernández, 1908-1979)가 편곡한 버전이다.

가사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con los pobres de la tierra) 나는 나의 운명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다.

시거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1963년은 마침 쿠바의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 직후였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이 쿠바혁명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대항하여 일체감을 추구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지향은 마르티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거는 쿠바의 민중가요를 자신의 레퍼토리에 적극적으로 추가하면서 반제, 반전평화 운동을 노래로써 확산시켰던 것이다.

혹은 시거의 대표곡이자 대표적인 반전가라고 할 수 있는 <꽃들은 다 어디로 갔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1961)는, 소련 작가 숄로호프(Mikhail Sholokhov, 1905-1984)의 소설 [고요한 돈강]에 인용된 코사크 민요 “꽃은 다 어디로 갔나? 소녀들이 다 꺾었지/ 그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녀들은 다 결혼했지/ 그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들은 다 군대에 갔지”라는 가사에 촉발되어 만들어 진 것이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어 “언제쯤이면 그들은, 우리들은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달을까”라는 메시지를 가진 반전가로 세계적으로 퍼져갔다.

특히 독일어 버전이 유명했으며, 피트 시거의 영향은 독일의 68년 ‘성난 젊은이들’에 의해 주도된 포크 리바이벌 운동에도 미쳤다. 피트 시거 자신도 동서독을 오가면서 음악가들과 교류했으며, 나치의 양심수 수용소에서 만들어진 저항가인 <늪지의 병사들(Die Moorsoldaten)>을 불러 국제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서 피트 시거하면, <아리랑(Ariran)>(1953 혹은 1954)을 부른 서구의 가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미국의 포크가수가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에만 경탄하고 의미부여를 하지만, 정작 그가 부른 그 <아리랑>이 어떤 <아리랑>이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아니다. 그것은 3.1운동 직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과 조선 민족해방운동을 결합시키고자 진력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님 웨일즈와 함께 작성한 자신의 회고록 [아리랑: 조선이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1941)의 서두에서 소개한 그 <아리랑>이다.

시거는 이 책에 기초하여 <아리랑>이 조선 왕조의 폭정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죽음으로써 저항하는 희생정신의 노래라는 걸 소개하며 분단의 역사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김산의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김산과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한국에서는 오래도록 금서로 있다가 1984년에 비로소 번역소개된 것을 떠올리면, 시거가 저항가요로서의 <아리랑>을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일부 국내 언론이 시거가 한국전쟁 참전시에 <아리랑>을 들었다고 한 것은 오보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추구한 ‘포크 리바이벌’이라는 것은, 다양성과 정치성을 추구하며 위로부터의 전통에 저항하는 ‘민중의 전통’ 구축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반제, 반전, 반자본적 계급 지향성이 뚜렷했으며, 시거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했던 노래”를 민중운동 속에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권력과의 긴장관계이며, 그것이 느슨해지는 순간, 그는 하염없이 ‘애국자’의 길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시거가 만년에 국가로부터의 각종 표창을 받고 오바마 대통령 취임 콘서트에서 노래했을 때, 그는 허드슨 강의 정화운동에 헌신하고 전통을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에 항거한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기억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그를 국민의 역사 속으로 회수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가 포크 리바이벌 운동을 탈환하고자 한다면, 시거가 일관되게 견지했던 탈국가적 계급 지향성을 다시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환경적 정의는 경제적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 환경주의자 시거의 “말”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가 부른 <이 땅은 당신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이 조국 찬미의 노래가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읊은 곡이었다는 그의 “노래 정신”이 묻히지 않도록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에 믿었던 것은 “노래는 모든 해방운동과 함께 했다”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 20century 60's 초 

포우크 송에는 작자불명의 옛 민요*와, 그 소박한 가곡형식과 정신을 근거로 삼은 현대의 포우크 송이 있으며, 여기서는 미국의 후자, 이른바 모던 포우크 송, 컨템퍼러리 포우크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의 이민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이 나라에는 영국을 주로 한 유럽 각국 민요의 가사를 바꾼 발라드나 흑인이 비참한 생활을 호소한 것 등이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와 레코드의 보급과 함께 흑인의 블루스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취입이 매출되는 동시에 존 및 앨런 로맥스 등에 의한 조사 채집도 실시되고, 거기에 자극받아 민요연구가 · 가수의 소박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피트 시거는 흑인 포우크 블루스 가수 레드베리와 불황시대의 미국을 노래한 우디 거슬리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자작곡에 의해 우경화(右傾化) 해 온 미국정부며 인종차별에의 저항,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포우크 운동에 정진, 196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나 시민권운동과도 결부된 포우크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존 바에즈를 비롯, 로크 이디엄을 살린 봅 딜런은 그 대표적인 가수, 싱거=송 라이터이다


http://maeihelpyou.tistory.com/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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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eihelpyou.tistory.com/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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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folk_rock_artists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4:32
지식백과 설명 1. 


1950년대부터 꾸준히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대중음악 장르. 다양한 형식의 기악곡, 팝 스탠더드, 보컬이 들어간 차분한 노래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라디오 방송의 형식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 빌보드지의 기자 클로드 홀(Claude Hall)이 뉴욕의 한 라디오 방송이 성인 취향의 음악을 중점적으로 방송하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명칭이 지어졌다. 이러한 방송이 인기를 얻으면서 3, 40대 청취자를 타깃으로 한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지 리스닝 방송들은 청취자들의 편안한 음악 감상을 위해 연주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했으며, 광고를 최소한으로 편성했다. 관현악단의 재즈 연주, 영화 주제가 등의 시끄럽지 않은 기악곡을 비롯해 차분한 팝 스탠더드 등이 이지 리스닝에 포함된다.

대표 아티스트로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 폴 모리아(Paul Mauriat),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 등이 꼽힌다. 대표곡으로는 퍼시 페이스(Percy Faith)의 <심 프럼 어 서머 플레이스(Theme From A Summer Place)>(1960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 헨리 맨시니의 <문 리버(Moon River)>(1961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1위), 배리 매닐로우의 <맨디(Mandy)>(1974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 리스닝 [easy listening]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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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2 .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이란? 

 '이지 리스닝'이란 말은 '부담 없이 듣는다' '

마음 편한 자세로 듣는다'라는 뜻으로 수년 전부터 널리 쓰이고 있는데, 

이는 세미 클래식, 만토바니의 무드 뮤직 등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데 요사이 '이지 리스닝 클래식'이라는 술어가 생겨나 모차르트의 디베르티

 멘토나 슈베르트의 '로자 문데' 같은 관현악곡을 범주에 넣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지 리스닝'이라는 술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지 리스닝'이라는 말이 나오면 하드 리스닝(Hard Listening), 디피컬트 리스닝 (DifficultListening)이라는 말도 자연스레 나올 법하다. 바흐의 클래식을 들을 경

우, 바흐의 관현악곡에는 즐겁고 부담이 없는 음악이 많으며, 듣기만 해도 기분

이 좋아지는 작품들이 꽤 있다. 이런 것을 흔히 '이지 리스닝 클래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지 리스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은 라디오를 켜놓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아니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놓

고 신문도 보고 책도 읽는다. 더욱이 심한 경우에는 TV를 보면서 이어폰을끼고

 FM 방송을 듣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지

장 없이 듣는 음악, '무엇무엇을 하면서 듣는 음악', 음악은 하는 일에 방해가 되

지 않을 정도로만 조용히 울리면 되는 음악, 리드미컬하면서도 난잡하지 않고

, 재미있는 멜로디이면서도 웬지 정감이 가는 그런 음악, 이런 모든 것을 통틀어

 한 마디로 '이지 리스닝'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지 리스닝'에 대하

여 알아본 결과 폴 모리아의 작품에 모두 포함되는 이야기이다. 이런 목적이 충

분히 포함되어 있고, 컴퓨터에서 뽑아낸 듯한 합목적적 음악이 폴 모리아의 음악

이고, 동시에 '이지 리스닝'의 음악일 것이다. 유행만 쫓는 음악 풍토 속에서 간

결하면서도 산뜻하게 아름다운 폴 모리아의 음악을 듣고있으면, 선적이고 시적

인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 시적인 아름다움은 곧 간결의 미인데, 여기에

 응집된 정감미는 한층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폴 모리아의 사운드 배경에는

 필시 프랑스 문화가 배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드뷔시나 라벨의 인상파 음악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갖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미술, 문학, 패션에까지 미치는 프랑스의 세련된 색조가 그의 배

경에 깔려 있기 때문에 폴모리아의 음악에는 기품이 서려 있다. 폴나레프, 미셀

 르그랑 등 당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탄생시킨 프랑스는 폴모리아에 있어서

 한 절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0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1:56
ㅗㅓㅗㅗㅗㅗㅗㅗㅗㅗ

힙합에 있어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분은 바로 East Coast와 West Coast간의구분 일 것이다.

 

음악적으로서의 East Coast Rap 과 West Coast Rap의 차이는 그 시작에서부터 존재해왔고 모든 랩은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진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남부랩 Southern Rap도있고 중부랩Midwest, Mideast Rap까지


West(서부),East(동부),South(남부),Midwest(중서부) 이런식으로 분류가 될수있지만 현재 음악적으로 포괄적으로 수용하면서 각자의 색깔이 모호해진상태라 이제 굳이 서부,동부음악을 따로 나눌필요가 없어보인다..

 


★동부힙합★

 

동부힙합의 근원은 New York이다..

 

뉴욕할렘가등 도시적이고 황량한 지역환경탓에 동부의 음악은 다소 무겁다..

 

음악적으로 East Coast의 랩은 비트에 있어서 베이스가 무겁고 샘플링에 크게 의존한다.

 

샘플한 루프를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 돌리기때문에, 비트가 매우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동부랩에서는 비트보다도 가사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편이며 때문에 랩에 있어서 별다른 기교 없이도 깊은내용과 메세지에 중점을 두고 가사를 읊는 경우가 많아 처음 듣는 이에게는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있다.

대표적인 래퍼로는 비기,우탱클랜,맙딥,나스,라킴,갱스타등이 있다..

 

대중성보단 음악적 무게감이 깊어 뛰어난 앨범이 많다..

 

대표앨범으로 동부의 3대명반으로 불리는..

 

나스1집 illmatic, 맙딥2집 infamous, 우탱1집 Enter The Wu-tang이 있다..

 

동부대표곡

 

Nas - N.Y State Of Mind

 

mobb deep - Shook Ones Pt II

 

Wu-tang clan - c.r.e.a.m

 

★서부힙합★

West Coast의 힙합은 동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사보다 비트에 더 신경을 쓴다.

 

서부힙합의 근원은 L.A다

 

뉴욕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자수가 가득한 따뜻한 지역에 영향을 받은 탓에 음악이 동부에 비해 한껏 친숙하고 접하기 쉽다....


비트가 다소 빠른 경우가 많고 멜로디를 중시하며, P-Funk나 R&B적 요소의 샘플링에 더 크게 의지한다.

전체적으로 파티풍의 분위기가 많고 춤을 추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랩스타일도 멜로디나 리듬을 타는 듯이 하는 경우가 많아 힙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친숙한 호감을 주기도 한다.

 

음악전체적으론 가사보단 비트에 더 중점을 두고있다..

 

국내에 소개되는 랩도 대체로 West Coast스타일인 경우가 많다.

 

한국사람은 영어를 이해하기어렵기때문에 아무래도 메세지에 중점을 두는 동부보단 비트가 역동적인 서부힙합을 이해하기가 쉬워서일것이다..

서부랩의 전성기는 N.W.A.와 같은 그룹으로 절정을 맞은 갱스터랩(GangsterRap)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흔히 G Funk나 갱스터랩을 West Coast힙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투팍,닥터드레,스눕독,워렌지등이 있다..

 

대표적인 앨범은 G Funk의 창시자 Dr.dre의 첫앨범이자 G Funk의 시작을 알리는 The Chronic

 

G Funk의 완성을 알리는 Snoop Dogg1집앨범 Doggystyle

 

웨스트의 거장 2pac의 All eyex on me앨범이 유명합니다..

 

서부대표곡

 

Snoop Dogg - Serial Killa

 

Dr.dre - forgot about dre

 

2pac - California Love


★남부힙합★


남부의 특색은 다른지역의 힙합보다 더욱 신나고 춤추기 좋은 음악이며 음악적장르가 그리 오래되진않아 사운드에서 미래지향적인 음악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예로 서부를 대표하던 음악이 G Funk였다면 남부는 Dirty south를 표방한음악이 대세를 이룬다

 

가장 클럽튠음악에 가깝다고 볼수있다..

 

Dirty south로 대표되는 남부 클럽튠음악이라 가사가 대체적으로 즐기자, 자기자랑, 여자, 마약 이런형식으로 가볍고 상스러운면이 있으며 랩스킬보단 랩간지나 비트를 중요시한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써 scarface,outkast,goodie mob,ludacris,nelly,chingy,j-kwon 가 있다


남부 대표곡

 

Ying Yang Twins - Naggin

 

Lil Jon & The Eastside Boys - Get Low

 

Outkast - Rosa Parks

 

중서부는 미국의 중부와 뉴욕을 제외한 미국 동부에 위치한 도시들, 그리고 서부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위치의 도시들의 힙합음악을 얘기하는 건데 비트는 개인적으로 그들만의 특징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랩에서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죠. 중서부의 래퍼들은 주로 텅 트위스팅을 이용한 빠른 랩을 구사해요.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Eminem, Slaughterhouse, Twista, J Dilla a.k.a. Jay Dee 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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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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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힙합 신화 Chapter 1 "HipHop Begins"

 

"What I try to do is just capture certain moments that stick in my head, certain moments that need to stick in brothers' heads. So it's a little of hip-hop history." - Rakim

 

“주변 사람들이나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야.

그건 바로 힙합 역사의 일부지.“ - 라킴

 

 

☞ 배트맨도 이미 다시 시작되었고 (Batman Begins) 슈퍼맨도 조만간 또 올 것 같은 지금 이 시점에서 힙합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힙합 문화의 4요소 중 하나로서의 'Rap/MCing'을 중심으로 힙합의 시작부터 어깨에 힘 빼고 탐구해보자.

 

 

힙합의 4요소는 알려진 대로 'B-Boyin'/DJing/Graffiti art/MCing'이다. 각 요소가 매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에 어느 요소가 힙합을 결정적으로 이끌어왔다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쉽게 단정 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연재되는 본 사이트는 음악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곳이므로 아쉬운 마음을 머금고 이야기의 핵심을 MCing과 DJing에 두기로한다. 랩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사실상 없다고 본다. 다만 자메이카의 Toasting(토스팅, 자메이카 특유의 억양으로 재주를 부리는 보컬 기술)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는데 비교적 정확한 근원은 ‘리듬의 성지’인 아프리카의 부족 사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 당시 통신 수단은 오직 사람의 입. 한 사람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최근의 '뉴스'를 알렸다. 그 사람이 어느 마을에 도착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곳에 모였고 마을의 음악인들은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메신저(messenger)는 그 비트에 맞춰 소식을 전하였다.” - 출처를 알 수 없던 어떤 자료 중 발췌

 

옆집 록산느하고 뒷집 음보마가 사하라 사막 중심에 온도계를 꽂았을 때 측정될만한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얘기가 왠지 봉고 드럼일 것 같은 타악기의 비트를 통해 전해졌다는 추측이다. 결국 랩은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또 그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태동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랩의 시작을 확실히 밝히기 위한 집착은 이쯤 하고 좀 더 속도를 내보자. ‘공식적인 랩음악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빌보드지에 의한 공식적인 최초의 랩음악은 80년초, 팻백 밴드(Fatback Band)가 녹음한 <King Tim III (Personality Jock)>와 슈거힐 갱(Sugarhill Gang)이 녹음한 <Rapper's Delight>이다. 이 역사적인 녹음 작업은 오늘날의 랩음악과는 달리 실제 라이브 뮤지션들을 이용한 밴드들의 연주로 반주가 녹음되었다.” 

 -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중 발췌 (이하 Hot Music 1997)

 

마침 존경받는 분들이라 영상 클립을 구할 수 있다. 이야기쟁이는 이럴 때 기쁨을 느낀다. 긴 얘기 짧게 할 수 있는 기쁨, 뭐 그런 것. 일단 감상하자.

 

 

누군가가 이 영상을 보고 촌스럽다 어쩌고 하면서 웃었는데 Sugarhill Gang은 힙합 역사에서 매우 명확한 ‘역사적인 팀’이다. 영상에서 보이는 스타일도 그 당시에는 매우 ‘첨단의 트렌드’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른바 Groove가 시대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쓰고 있는 본인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상당히 신나고 흥겨운 트랙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Rapper's Delight”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시적인 ‘최초의 공식적 랩음악’이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그 시작을 간접적으로 목격하셨다. 기뻐하시길.

 

개론 형식의 첫 글이기에 요약하며 마무리할까 한다. 힙합뮤직의 시작은 아프리카에서 봉고 드럼 비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뒷담화를 하면서 이루어졌다. 아니 이런 요약은 무책임한 것이기에 다시 얘기하자면 이야기를 음악적 표현, 특히 율동(Rhythm)을 극대화한 표현을 빌려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그 욕망을 오늘날의 우리가 HipHop Music으로 이어받아 이리도 명랑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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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힙합 신화 Chapter 2   "Kool 'DJ' Herc Is In The House"

 

 

["KOOL HERC (THE STORY)" - CHANNEL 4 BOOKS]

 

"Every Jamaican record has a dub side to it. So I just tried to apply that.(중략)I could have a couple more records got the same break in it - I wonder, how it be if I put them all together and I told them: "I'm going to try something new tonight. I'm going to call it a merry-go-round." The B-Boys, as I call it, the energetic person, they're waiting just to release this energy when this break comes in.' Herc saw a ready-made audience for his 'breakdowns'." 

 

“모든 Jamaican 음반에는 dub(드럼 비트가 강한 리듬 부분)이 있다. 난 그걸 적용해 보려고 했다.…(중략)…나에게는 비슷한 Break을 가지고 있는 음반이 몇 장 더 있었다.  만약에 이 '특정 부분을 모아서 그 부분만 튼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댄서들에게 난 '오늘 밤에는 새로운 것을 선사하겠다. 그것을 Merry-go-round1)라고 부르겠다." 라고 말했다. 내가 "B-Boy"라 부르는 그들,  이 열정적인 사람들은 이 break에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하기만을 기다렸다. Herc는 그의 "Breakdown"을 기다리는 이미 준비된 관중을 보았다." 

 

- Alex Ogg & David Upshal, 1999
  Copyright ⓒ Channel 4 Books 

 

※ 1) Merry-go-round : 회전목마. 여기에서는 Kool 'DJ' Herc가 개발한 두 개의 Breakbeat 부분을 한데 섞어서 트는 형식을 말함.

 

 

☞ 미국은 건국의 아버지(the Founding Fathers)를 상당히 존경한다. 익히 알려진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해당되겠다. 이들에 대한 존경은 오늘날 미국 화폐인 "Dollar"에 이어지는데 Dollar에서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역시 돈이 최고!는 아니고, 힙합 문화에도 역시 창시자인 '아버지'가 계신다. Kool 'DJ' Herc, 그를 얘기한다.

 

                      

 (Herc 옹께서  자신이 개발한 "Merry-go-round"를 선보이는 동영상)

 

Kool 'DJ' Herc는 1955년생으로 뉴욕의 브롱스(Bronx) 지역에서 힙합 음악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파티를 주관하는 DJ로서 James Brown으로 대표되는 하드 펑크 계열의 음반을 주로 틀었다. 이는 당시 브롱스 지역의 분위기와 태동하기 시작하는 70년대 Disco 음악의 반영이었다. 파티를 주관하며 Herc는 그의 댄서들의 반응을 보고 그들을 위해 하나의 Break에서 다른 Break으로 옮겨가는 방식을 개발한다. 이것은 음반의 드럼 비트를 강조하기 위해 반주 부분만을 택해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그의 독창성이 드러난 부분이다. 이는 힙합 음악의 최초 형태가 된다.

 

두 개의 턴테이블을 사용해 같은 음반을 동시에 플레이하여 Break 부분을 연장하는 Herc의 스타일은 Breakbeat의 형식을 창조한다. 이 Breakbeat는 hard funk, rock, Latin 타악기가 연주된 음반등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힙합음악의 기초가 된다. Herc는 중간 중간 각운(Rhyme)이 맞는 문장을 외치며 댄서들과 흥겨운 앙상블을 만들어 냈는데, "Put Yo' Hands In The Air and Wave'em Like You Just Don't Care"와 같은 형태의 이러한 문구는 오늘날의 Rap의 초기 형태에 해당한다. 또한 그는 그의 파티와 함께하는 댄서를 "Break-Boys", "Break-Girls"라고 불렀다. "B-Boys", "B-Girls"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Herc의 DJing 스타일은  Afrika Bambaataa, Grandmaster Flash 등의 유능한 후발 주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초창기 힙합 음악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Herc는 그의 후발 주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음악적 업적을 굳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힙합의 시조(始祖)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큰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Kool Herc의 큰 업적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힙합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니 혼자 보기 아까운 자료가 있어서 인용의 형식으로 옮겨본다. 

 

「 "이 당시 클럽에서 활동하던 DJ들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미리 알았는데, 음악을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단하고는 'Yo This is Kool Herc In The Joint-Ski Saying My Mellow-Ski Marky D Is In The House'와 같이 외쳤다. 참석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행위는모든 파티 참여자들이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형태로 변형되었는데, 차츰 발전하여 미약하나마 각운을 가진 'Davey D Is In The House, An He'll Turn It Out Without A Doubt'와 같은 형태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문구는 나중에 많이 사용하는 'Throw Yo Hands In The Air, AndWave'Em Like Just Don't Care'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짧은 형태의 라임들은 차츰 복잡해지고 길이가 길어지더니 다양하고 긴 형태의 라임들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당시엔 랩이라 부르지 않았고 엠씽(Emceeing)이라고 불렀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래퍼를 MC라고 부른다) 이러한 긴 구문을 가진 랩은 Signifying, Testifying, Shining Of The Titanic, The Dozens, School Yard Rhymes, Prison 'Jail House' Rhymes, Double Dutch Jump Rope Rhymes와 같은 용어로 불린 다양한 형태로 행해졌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형태의 래핑은 일종의 게임과 같은 형태였는데, 소위 말하는 배틀(Battle Rap)이란 형태로 흑인의 거리문화를 이끌어 갔었다. 이 배틀랩이란건, 말 그대로 하나의 주제를 놓고 정해진 시간 내에 랩을 통해 상대를 이기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인 언어구사를 통해 상대를 꼼짝못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배틀랩은 돈을 걸어 도박을 하듯 진행되었는데, 오늘날 랩 가사에서 래핑을 게임(Game)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랩의 발전에 힘입어, 마침내 쿨 허크는 자신의 DJ 테크닉을 바탕으로 코크 라록(Coke La Rock), 클락 켄트(Clark Kent)라 불린 두 MC를 영입하여 마이크를 잡게 하고 팀을 만들었다. 바로 이 팀이 랩 음악 역사상 최초의 Emcee팀 쿨 허크 앤 더 허클로이즈(Kool Herc And The Herculoids)인 것이다." 」

 -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중 발췌 인용

 

 

                       

(Kool 'DJ' Herc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시 한 번 Kool Herc의 업적을 정리하며 공부도 많이 되었고, 새삼 놀라웠다. 힙합 음악의 창작 방법(DJing), 각운을 활용하여 분위기를 돋구는 문구 외침(MCing/Rapping), 심지어 힙합 문화에 있어서의 댄서의 정의(B-Boying)까지. 그의 새로운 것에 대한 진보적인 연구와 의욕은 오늘날 우리에게 'HipHop'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꺼내라고 있는 단어 "Respect"이 아닐는지. Kool Herc, 오늘날에도 종종 이분의 모습을 뵐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기쁨이다. 그에게서 시작되어 우리의 오늘을 흥겹게 하는 모든 힙합 뮤지션들의 유산. HipHopMusic. 고마웠고 고맙고 고마울 것이다.

 

                               사진

     

    대미를 장식할 영상 클립은 "DJ Kool Herc b-boy boogie(MERA)"라고 하는 클립이다. 솔직히 놀랐다. 진정한 Groove는 시대를 뛰어넘는가 하는 생각에. 같이 즐기며 이번 챕터를 마칠까 한다. 사랑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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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2 끝, To Be Continued -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1969 많은 힙합 뮤지션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제임스 브라운이 '킹 레코드'를 통해 "Say It Loud - I'm Black And Proud!"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이 앨범은 힙합 역사상 가장 드럼 샘플링이 잘된 앨범으로 뒤에 인정되었다. 

    ★ 출처 - 흑인음악 매거진 '힙합엘이' ( http://HiphopLE.com ) (무단으로 출처 삭제,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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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ies]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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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3   "New Bloodz for Old Skool"

     

     

    "In New York, they've already been through all the gang stuff, all the bragging about cars, girls, and gold. Now, there's a cutural awareness that's happening in the East, and it's stretching across the country. It's just taking a longer time for L.A. to become aware."

    -Afrika Bambaataa 

     

    “뉴욕은 이미, 갱도 한번 휩쓸고 지나갔고, 자동차나, 여자들이나, 돈 따위를 으스대는 짓거리들도 다 지나갔어. 이젠 새로운 문화적 자각이 동부에서 시작돼서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지. 이젠 천천히 L.A.가 정신차리기를 기다려 보자구."

    - 아프리카 밤바타

     

    ☞ DJ Kool Herc에서 비롯된 힙합 뮤직은 의욕적이고 뜨거운 후발 주자로 인해 더욱 그 꽃을 화려하게 피게 된다. 이번 장에서는 Kool Herc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후배들의 이야기를 다뤄보기로 한다. Afrika Bambaataa (And the Soulsonic Force)와 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가 그들이다. 7-80년대  힙합의 태동기에 묵직하고 패기있는 출사표를 던지고 초기 힙합 음악의 사운드적인 기초를 쌓는데 큰 기여를 한  "New Bloodz for Old Skool",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즐겨보자.  

     

    [Afrika Bambaataa - <Planet Rock>]

     

    언제나 이 "본토 힙합 신화"에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 이 "본토 힙합 신화"가 가능하게 한 위대한 자료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에서 소중한 기록을 빌려온다.

     

    「 "초기 동부 랩을 정착시킨 인물

     

    1960년 생인 그는 그랜드 마스터 플래쉬와 더불어 초창기 동부 랩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1977-1985년까지, DJ와 MC 그리고 심지어 브레이크댄서로서도 명성을 날린 그는 1986년 그의 첫 앨범인 [Planet Rock-The Album]을 내놓게 된다. 물론 그 이전인 1983년 그가 만든 그룹 줄루 네이션(Zulu Nation)의 앨범도 있다. 그는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인 존 라이든(John Lydon)이나 흑인음악의 대부인 제임스 브라운과도 함께 작업하였으며, 새로운 신세대 DJ들이 나오기 시작한 80년대 후반까지 힙합계의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특히 그는 70년대 후반의 흑인 갱이나 불량 청소년들을 음악이나 춤으로 빠져들게 함으로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

     -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중 발췌 인용

     

     

    [Afrika Bambaataa - <Freestyle> : 나이키 광고 관련하여 작업한 것으로 기억하며, "무서운 영화 2"에도 패러디되었다]

     

    Break-beat deejaying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서 Afrika Bambaataa는 특히 Electro Funk Sound의 아버지로서도 존경받는다. 초창기의 힙합 사운드의 '기계적', '기능적' 형태를 매만졌던 선구자들이었는데 Kool Herc에 이어 후발주자에 이르러서는 좀 더 정교한 형태로 발전한다. 이는 마치 팝음악계의 전설적인 존재인 "The Beatles"가 스튜디오 레코딩에만 집중했던 시절 녹음기술이나 여타 음향기술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에 비견할만 하다. 세상은 어찌 보면 이렇게 신념을 가지고 몰입하는 천재들에 의해 발전하는 것 같다. 이러한 천재들은 마음가짐도 올곧았던 듯. Afrika Bambaataa의 가장 큰 업적은 '인종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인 Afro-American의 젊은 세대가 마약과 갱 조직의 유혹에서 벗어나 춤과 음악에 끌리게 했다는 점이다. 음악이 인간을 구원한다면 이러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Afrika Bambaataa의 성장기는 역시나 뛰어난 뮤지션의 일반적인 그것과 같았다. 흑인 자유 운동 활동가였던 어머니와 삼촌의 영향 하에서 그의 어머니가 제공한 풍부한 음반 컬렉션이 그의 성장을 도와주었다. 그는 자신의 동네에서 지배적인 힘을 갖는 무리  "The Savage Seven"의 지도자가 되는데 그 동네의 '법' 자체가 되는 무리이면서 지역 건강 프로그램을 돕기도 하는 등 특이한 성격을 가진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의 지도자적 역량이 참 뛰어났던 듯 싶고 그 무리(The Savage Seven)은 상당한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규모가 커진 집단은 The Black Spades로 이름을 바꾼다.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정적으로 바뀐 일이 생기는데, 수필 대회에서 입상을 하였고 그 결과로 아프리카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그는 영화 "Zulu" 또한 보게 되는데 Zulu족의 단결과 공동체 의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Zulu족의 추장이었던 Bhambatha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Stage Name인 Afrika Bambaataa Aasim을 만든다. 자신이 속해있던 모든 조직도 정리하여 흑인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한다. 그의 선배인 DJ Kool Herc와 Kool DJ Dee의 영향으로 파티를 주관하는 DJ로서의 커리어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더한층 높아진다. 이후의 그의 힙합 음악 역사상의 활약은 쓸 공간이 부족하여 생략한다. Afrika Bambaataa and Soulsonic Force의 그룹으로서 힙합 음악의 기술적 진보, 이른바 하이테크적인 사운드를 만드는데 앞장서고, Afrika Bambaataa와 그를 돕는 사람들의 가장 큰 업적인 The Zulu Nation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The Zulu Nation은 90년대 힙합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Wu-Tang Clan", 현재의 힙합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Odd Future (Wolf Gang Kill Them All, OFWGKTA)를 연상하면 될 1973년 11월 12일 탄생한 '최초의 힙합 집단, 무리'였다고 전해진다. 많은 수의 B-Boy와 MC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간지가 나는' 집단이었다는 기록. Bambaataa의 Universal Zulu Nation에 대한 구상은 소외된 흑인 청소년, 후세대의 Afro-American이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시각'을 갖도록 돕는 집단, 또는 그러한 역량을 가진 집단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역시 큰 그릇은 생각을 하는 것도 규모가 다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음악을 통해 폭력과 마약의 위협에서 후세대의 흑인 공동체를 구해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세계에 힙합 문화를 확산하게 한 큰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저 Respect. 쓰다 보니 더욱 Respect.

     

     

    [Can't Nobody Hold Me Down - Puff Daddy And Mase]

     

    이 곡을 기억하는가? 한 때는 글을 쓰는 본인도 참 '좋아했던' 이제는 그냥 Diddy인 아저씨의 작품이다. 당시의 빌보드 차트를 뒤흔들었었다. 이 때는 Ma$e도 날라다녔는데 요즘은 뭐 하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이 곡의 원곡이 바로 이 곡.

     

    [Grandmaster Flash - <The Message>]

     

     가끔 7-80년대 힙합 트랙을 들으면서 놀라는데 당시의 패션이나 분위기는 '당시에는 첨단인데'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는 - 본인은 그런데 이런 시각이 좀 우습다. 지금 유행하는 것을 후세대가 보면 안 비웃을 것 같나? Respect을 좀 갖자. 언제나 온고이지신, 옛것을 Respect하면서 오늘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 촌스럽고 개그의 소재가 되겠지만, 그 사운드만은 절대 촌스럽거나 고리타분하지가 않다. The Sugarhill Gang의 <Rapper's Delight>이 그렇고 이 <The Message>가 그렇다.

     

    King Grandmaster Flash로 많이 알려진 Joseph Saddler는 1958년 1월 1일 Barbados의 Bridgetown에서 태어난다. 힙합뮤지션이자 DJ로, 특히 Hip-Hop DJing, cutting, mixing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매우 잘 알려졌다. 그는 Samuel Gompers High School에 입학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전자 장비를 어떻게 수리하고 만지는지 배운다. 역시나 그의 부모님이 그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그의 부모님은 Barbados 출생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Caribbean과 미국 흑인 음악 음반의 열성적인 수집가였다. 아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수집 음반에 매료되었다. Saddler, Grandmaster Flash의 DJing에 대한 이른 관심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도 컸으나 그의 어머니의 '그가 전자장비에 관련된 공부를 하기 바라는 마음'의 영향도 컸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초창기 New York DJ scene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 파티에 참석하며 DJing을 한다. 그리고 선구자적인 전문가로서 명성을 날린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전 복싱 페더급 세계 챔피언 Sandy Saddler의 조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DJing skill이 잽을 날리듯 날카로운 것일까?    

     

     

    그의 DJ로서의 활약은 수많은 실험적인 DJing skill의 연습에서 비롯된다. 10대 때부터 그의 침실에서 그는 DJ 장비를 가지고 여러가지 실험적인 연구를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획기적인 3가지의 DJing Skill을 발전시키고 마스터한다. 이 스킬들은 DJing 테크닉의 정석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져있다.  Backspin Technique ("Quick-Mix Theory"), Punch Phrasing ("Clock Theory"), Scratching이 그것인데 참 재미있으니 이 글을 읽은 후 한 번 정보를 찾아보도록.

     

    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력있는 랩퍼들과 함께 슈퍼 그룹 "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78년  New York City의 South Bronx에서 결성된 이 그룹은 One DJ (Grandmaster Flash) 그리고 5명의 랩퍼 Melle Mel, Kidd Creole, Cowboy, Mr. Ness/Scorpio, Rahiem로 구성된 그룹이다. 이 그룹의 턴테이블리즘의 활용,  break-beat deejaying은 초창기 힙합음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초반에 이들은 성공한 싱글 "Freedom"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싱글 "The Message"가 이들을 힙합씬에서 두드러진 그룹으로 알려지게 한다.  후에 멤버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다시 재결합하여 뚜렷한 음악적 성과를 남겼다. 결과적으로 이 그룹은 4년간의 활동 속에서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했다. 2007년도에 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는 명예로운 최초의 힙합/랩 아티스트로서 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올라간다.

     

    이번 챕터는 특히나 힘들었다. 나 개인의 '글을 쓰는데 있어서의 막힘'이 오기도 했고 도대체가 이 두 팀은 자료가 방대하여 요지만 전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다 전달한 듯 하여 다행이다. 좀 더 궁금한 점은 글을 쓴 본인이 키워드나 개략적인 정보를 던졌으니 꼭 찾아보기를 바란다. 이 New Bloodz for Old Skool, "Afrika Bambaataa"와 "Grandmaster Flash"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두 힙합 음악의 대가가 닮은 듯 다르다는 점이다. 힙합 음악 초창기의 전문가라는 점과 어렸을 적 음악을 매우 좋아하고 그에 걸맞는 음반 컬렉션을 가진 부모를 두었다는 점은 매우 닮았지만 한 명(Afrika Bambaataa)는 운동가나 조직의 리더로서의 역량이 강했고 한 명(Grandmaster Flash)는 기술적 테크니션의 역량이 강했다는 점이다. 이 둘의 특성이 섞여서 오늘날의 '힙합 음악'이 단조롭지 않고 거대한 '즐거움의 음악'이 되지 않았나 싶다. 두 대가에게 무한한 Respect의 마음을 올리며 이만 Chapter 3을 마감할까 한다.

     

    사랑과 평화.

     

    2011. 4. 14. Mr. TExt

     

     

     - Chapter 3 끝, To Be Continued -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1970  힙합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더 래스트 포잇 레코드사(The Last Poets Record)가 자사의 이름으로 LP 앨범을 발매하였는데, 이 앨범에는 재즈 드러밍과 함께 여러 연주음악들과 사람의 목소리들이 믹싱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자료와 기사에서 인용과 발췌가 있었습니다>

     

    ▣ 주요 인용 Source

    1.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및 사실 관계

                                                                                  확인, 발췌, 인용.

    2. 주요 역사적 사실 인용 : http://en.wikipedia.org/wiki/Afrika_Bambaataa

                                       http://en.wikipedia.org/wiki/Grandmaster_F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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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ies]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4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4 "The Sugarhill Gang‘s Delight"


    It was twelve o'clock one Friday night
    I was rocking to the beat and feeling all right
    Everybody was dancing on the floorDoing all the things they never did before


    어느 금요일 밤의 12시가 무르익고 있었어

    나는 비트에 맞춰 흔들었고 아주 신 났지
    모두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
    이전에 전혀 해보지 못한 것을 하면서 말이야


    - The Sugarhill Gang “Rapper's Delight” (1979)



    ☞ ‘최초’라는 것에 강박적으로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원조’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최초의 랩 곡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힙합 싱글’의 얼굴을 가지고 미국과 세계를 춤추게 했던 “Rapper's Delight”. 이번 챕터에서는 힙합에 관심을 둬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I said a hip, hop, the hippie, the hippie to the hip hip hop”의 주인공, 슈거힐 갱을 만나 보자. 도대체 어떤 매력이 이들의 ‘Groove'를 오늘 이 시점에도 촌스럽지 않게 느끼게 만드는가 재미있게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 (이하 「랩 대해부 What is Rap?」) 에서는 슈거힐 갱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시각임을 고려하고, 이해하며 읽자. 

    자기 세계를 고집스럽게 구현하는 밴드

    슈거힐 갱은 “Rapper's Delight”이라는 곡을 발표한 것만으로도 힙합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스터 지(Master Gee), 원더 마이크(Wonder Mike), 빅 뱅크 행크 (Big Bank Hank)의 3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79년 첫 싱글을 발표하고, 80년 초 해체되기 전까지 비록 활동한 시기는 짧으나 힙합 역사의 장을 연 장본인들이다. …(중략)…, 빅 뱅크 행크는 90년대 초, 쓰레기 청소부로 일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요즘 한 곡만 히트를 해도 온몸에 금과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아티스트들과 비교할 때, 그 당시 얼마나 힙합이 대중성이라는 것과는 격리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




    - The Sugarhill Gang - “Apache (Jump On It)”

    뉴 저지의 잉글우드(Englewood, New Jersey) 출신인 원더 마이크와 빅 뱅크 행크, 마스터 지는 실비아 로빈슨(Sylvia Robinson)의 기획 아래 모이게 된다. 그녀는 음반 업계의 거물이던 남편 조 로빈슨(Joe Robinson)과 슈거 힐 레코즈(Sugar Hill Records)를 설립하였다. 이 레이블과 그룹 슈거힐 갱의 업적은 “Rapper's Delight”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 독보적인 힙합/랩 싱글은 Top 40 히트에 올라간 최초의 ‘힙합’ 싱글로 기록되었고, 이후 힙합의 대중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곡은 시크(Chic)의 "Good Times"에서 따왔는데, 전담 밴드였던 파지티브 포스(Positive Force)의 베이스와 기타 연주를 통해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싱글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슈거힐 갱은 불미스러운 일에서도 ‘원조’가 된다. 빅 뱅크 행크(Big Bank Hank)의 가사 부분은 그랜드마스터 캐즈(Grandmaster Caz)가 썼는데, 캐즈는 자신의 기여에 합당한 몫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전해지며, 원곡의 소유자인 시크의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와 버나드 에드워즈(Bernard Edwards)에게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초의 ‘힙합에 관련된 법적인 다툼’으로 기록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나일 로져스와 버나드 에드워즈가 공동 작업자로 표기되고 향후 발생할 수익에 대한 로열티를 보장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이후 화해를 한 나일 로져스는 “Rapper's Delight”에 대한 화를 풀고, 자신이 참 좋아하는 곡이며, 자신의 그룹, 시크의 곡을 샘플링한 곡 중 매우 뛰어난 곡이라는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고 한다.



    - The Sugarhill Gang - “Rapper's Delight”


    여러분이 직접 들을 때 실감이 되고 더 좋을 이 곡, “Rapper's Delight”에 관한 사실을 좀 더 풀자면, 

    1. 각각 14:37 (12인치 long version), 6:30 (12인치 short version)와 4:55 (7인치 shortened single version)의 3가지 버전이 존재한다고 한다.

    2. 최초 배포가 된 지 10년 후, 벤 리브랜트(Ben Liebrand)를 통해, "Rapper's Delight '89"라는 제목으로 공식 리믹스 버전을 공개했다고 한다.

    3. U.S. 팝 차트에서 36위, U.S. R&B 차트에서 4위, Canadian 싱글 차트에서 1위, Dutch Top 40에서 1위, UK 싱글 차트에서 3위 등 그야말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4. 미국 레코드 공업협회(RIAA)의 공인은 없지만, 최소 500만 장에서 최대 800만 장에 달하는 판매량을 보였다고 한다. 다이아몬드를 달성하였다고. 일개 독립 레이블이 달성한 기록임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5. 롤링 스톤 매거진 (The Rolling Stone magazine)의 '위대한 곡 500 (The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목록에서 251위를 했고, About.com과 VH1의 ‘위대한 힙합곡 100(100 Greatest Hip-Hop Songs)’ 목록에서 각각 2위를 했다. 



    - 영화 웨딩 싱어(The Wedding Singer, 1998)에서

    이 곡은 매우 많은 영화, 드라마, 심지어 게임에서도 등장하지만,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추천하고 싶다. 이 곡의 인상을 제대로 새겨준 장면으로 기억한다. 극 중 주인공에게 노래를 배우던 할머니께서, 결국 음악의 도를 깨달으셔서 펑키한 힙합 전사(?)가 되시는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이 곡은 이렇게 ‘힙합’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언급되는 영원한 ‘참고문헌’이다. “Rapper's Delight” 이후, 슈거힐 갱은 몇몇 크지 않은 히트곡,  "Apache", "Eighth Wonder" 등을 선보이지만, 원 힛 원더(One-hit Wonder) 그룹이라고 해도 될 만큼 우울한 커리어를 이어간다. 이후, 1999에 재결성하여 아이들을 위한 앨범을 녹음하고 투어를 다니기도 했지만 별 반향이 없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밥 싱클레어(Bob Sinclar)와 원더 마이크, 마스터 지가 콜라보를 하여 "Lala Song"을 공개하였다. 이후로는 별다른 행적이 없는 듯하다.

    비록 하나의 곡이 그들의 대표곡이자 이른바 ‘인생의 곡’이 되었지만, 슈거힐 갱은 그야말로 ‘힙합곡을 듣는 기쁨(delight)'을 힙합 역사에 아로새긴 그룹이다. 아직도 이 곡의 베이스와 드럼, - 물론 시크의 "Good Times"가 깔아놓은 멍석이지만 - 착착 감기는 훅(Hook)은 '이래서 힙합 음악이 좋은 거다’ 하는 부분을 계속 상기시킨다. 즐겨 듣던 사람은 한 번 더 듣기를 권하고,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랩퍼의 즐거움’이 아닌 ‘감상자의 즐거움’을 누리기 바란다. 그러면 이만 Chapter 4를 닫는다.  

    사랑과 평화.


    - Chapter 4 끝, To Be Continued -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1973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Living For The City"가 정치적인 메시지와 거리에서 들리는 버스들과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소리, 사이렌 등 랩 음반에서 많이 쓰이는 요소들을 포함하여 발매된 앨범으로는 최초로 히트를 하였다.

    자메이컨 그룹인 더 인크레더블 봉고 밴드(The Incredible Bongo Band)가 [Apache]라는 앨범을 통해 이제껏 나온 것 중 최상의 샘플링된 비트들을 사용한 앨범으로 후에 인정받게 되었다.

    (「랩 대해부 What is Rap?」에서)


    ★ 출처 - 흑인음악 매거진 '힙합엘이' ( http://HiphopLE.com ) (무단으로 출처 삭제,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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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ies]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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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5 "The Magical Sounds Around Here"



    And now you're kinda cold to the people you meet

    Cause of something that was done to you by some creep

    But nevertheless, I'll say it again

    That these are the people that we call friends


    이제 너, 만나는 사람에게 차갑게 구는구나

    못된 녀석들에게 당했던 일 때문에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할게

    그 사람들이 우리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 Whodini “Friends” from [Escape(1984)] 中



    ☞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힙합은 여러 가지 사운드적인 진보와 스타일에서의 혁신을 이룬다.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와 그랜드마스터 플래쉬(Grandmaster Flash)의 ‘소리의 혁신’은 새로운 후발 주자들이 좀 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만한 견고한 배경을 제공했다. 이번 챕터에서는 힙합 음악이 라디오 방송국에서 승승장구하고 좀 더 대중의 취향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던 후디니(Whodini)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시대를 풍미했던 탈출 묘기의 장인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한 이름의 이 그룹은, ‘소리의 마법’ 같은 좋은 유산을 많이 남겼다. 이들의 마술 공연 같은 커리어를 따라가 보자.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 (이하 「랩 대해부 What is Rap?」) 에서는 후디니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시각임을 고려하며 함께 읽자.



     록과 랩을 접목해 랩을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림


    초기 랩의 선구자로서 그들의 그룹 결성은 83년으로 뒤돌아 간다. 저릴 허친스(Jalil Hutchins)와 엑스터시(Ecstasy), 그리고 턴테이블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로 불리는 그랜드마스터 디(Grandmaster Dee), 이상 3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미흡하기는 했지만, 록과 랩을 접목한 최초의 힙합 그룹이자 당시만 해도 일부 흑인에게만 인기 있던 랩뮤직을 어느 정도 상업적인 장르로 끌어올린 장본인들이다. 1983년 그들은 자이브(Jive)사 최초의 랩 싱글이자 최초로 뮤직비디오로도 만들어진 랩 노래인 "Magic's Wand"를 발표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최초로 전문 댄서를 포함한 랩 그룹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83년과 84년 전국적인 투어를 가진 그들은 86년이 되던 해, 뉴욕시의 지원을 받아 마약 퇴치 비디오인 "Growing Up"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후 해체와 결합을 반복하면서 3장의 앨범을 내놓기는 했으나 모두 상업적인 실패를 맛보았다. 하지만 초기 힙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이들이 없었다면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메이저 장르로 정착한 지금의 힙합은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Hot Music 1997. 10월호 「랩 대해부 What is Rap?」




    - Whodini - “Magic's Wand”


    뉴욕의 브룩클린(Brooklyn, New York)을 기반으로 하는 이 트리오는 1981년에 결성되었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저릴 허친스, 조로(Zorro) 스타일의 모자를 즐겨 썼던 존 플레쳐(John Fletcher, 예명: 엑스터시), 턴테이블 아티스트였던 DJ 드류 카터(DJ Drew Carter), 그랜드마스터 디가 그 멤버였다. 후디니는 미 전역에 걸친 힙합 음악의 인기를 이끌고, 이 음악이 라디오 방송국으로  진입하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팻 보이즈(The Fat Boys)나 그랜드마스터 플래쉬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 등과 동시대에 힙합 음악을 이끌며 어깨를 나란히 한 그룹이다. 이들은 런 디엠씨(Run-DMC)의 조셉 "런" 시먼스(Joseph “Run” Simmons)의 형제인 러셀 시먼스(Russell Simmons)의 매니지먼트 하에 음반 레이블 자이브 레코즈(Jive Records)와 1982년에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이들의 음악은 지역 어반/알앤비 라디오 방송국을 위주로 인기를 끄는데, 많은 곡을 베이스 연주자이자 런 디엠씨의 초기 작업을 많이 주도했던 래리 스미스(Larry Smith)가 맡는다.


    1983년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딴 첫 번째 앨범 [Whodini]를 발매한다. 이들의 최초 싱글 "Haunted House Of Rock"은 할로윈을 주제로 한 곡으로, 오늘날의 클럽에서도 플레이가 된다고 한다. 또한, 신스팝(Synthpop)의 선구자였던 토마스 돌비(Thomas Dolby)가 또 다른 싱글에 참여하는데, 그것이 바로 "Magic’s Wand"이다. 이 곡은 이후 많은 후배들이 샘플링하게 된다. 여러모로 영향을 많이 끼친 곡이었다.




    Whodini - "Friends"


    1984년 이들은 두 번째 앨범 [Escape]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에는 "Five Minutes Of Funk", "The Freaks Come Out At Night"과 특히 인기를 많이 끌었던 "Friends"가 수록되었다. 이 앨범의 수록곡은 힙합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각각의 곡은 그 독특한 이야기가 사랑받으며 미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백만 장이 넘는 판매고는 이 앨범의 탁월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후 "Five Minutes Of Funk"의 인스트루멘탈 버전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WNYC의 TV쇼 <Video Music Box>의 테마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들의 성공은 1986년에 발매된 세 번째 앨범 [Back In Black]까지 이어지는데, 1982년에서 1986년까지 이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런 디엠씨와 엘엘 쿨 제이(LL Cool J), 팻 보이즈와 투어를 함께 했고, 최초의 힙합 투어 격인 'Fresh Fest Tour'에도 참여한다. 1986년 7월경에는 필라델피아의 18,000여 명 관중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최초로 랩과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는 투어를 한 팀으로 기록된다.


    1987년 발매한 [Open Sesame]부터는 시대의 조류에 호응하여, 뉴 스쿨(New School) 스타일로까지 이들의 음악적 색채를 확장한다. 하지만 이때즈음 이들의 하락세는 뚜렷해졌고, 1991년에 발표한 [Bag-a-Trix]와 1996년에 발표한 [Six] 앨범은 별다른 주목을 못 받으며 상업적인 실패를 맛본다. 이후 많은 컴백 시도에도 전성기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후디니는 여전히 요즘에도 투어를 하고 있고, 아직도 그들의 지난 앨범들은 많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대중 문화에 전반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GTA(Grand Theft Auto: Vice City)>라는,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비디오 게임에 그들의 노래인 "Magic's Wand", "The Freaks Come Out At Night"가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 (게임 속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들을 수 있다), <Everybody Hates Chris>라는 유명 흑인 가족 시트콤을 제작한 코미디언 크리스 락(Chris Rock)은 공공연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후디니라고 밝혔으며, 시트콤 내에서도 후디니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 Nas - “If I Ruled The World (Imagine That)”


    앞서 언급했듯 이들의 음악은 후배들에게 엄청나게 많이 샘플링이 되는데, "Five Minutes Of Funk"도 그렇지만 특히 "Friends"는 투팍(2Pac)의 "Troublesome '96"를 포함,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15곡이 넘는 트랙에 샘플링된다. 나스(Nas)의 “If I Ruled The World (Imagine That)” 또한 "Friends"를 샘플링한 대표적인 곡 중 하나이다. 


    자, 이렇게 80년대에 멋지게 빛나며, 힙합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후디니에 대하여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저런 영화의 OST에 삽입되기도 하고, 게임 속에서도 들을 수 있고, 후디니의 음악은 정말 마법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이 힙합 음악의 라디오 방송국 진입을 주도했고, 아직도 방송국 DJ들의 플레이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이들. 개인적으로 후디니의 곡을 샘플링한 - 후디니 자신도 샘플링을 잘 활용하기도 했다. - 트랙들이 여러분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또 참 좋은 곡들이기 때문에 꼭 찾아서 비교하며 듣기를 권장한다. 내가 즐거웠듯 여러분도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빌며, 이만 Chapter 5를 마감할까 한다.


    사랑과 평화.


    - Chapter 5 끝, To Be Continued -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1974-80 자메이카계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레게 스타일의 음악이 뉴욕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스트(Boast)라고 불리는 일종의 주절거림을 자신들의 음악 위에서 했다. 


    (「랩 대해부 What is Rap?」에서)

    ★ 출처 - 흑인음악 매거진 '힙합엘이' ( http://HiphopLE.com ) (무단으로 출처 삭제,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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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ies]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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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토 힙합 신화 Chapter 6   "Yes, Melle Mel Is Grandmaster"


    Rats in the front room, roaches in the back 
    Junkie's in the alley with a baseball bat 
    I tried to get away, but I couldn't get far 
    'Cause a man with a tow-truck repossessed my car 

    앞방에 쥐들이 들끓어, 뒷방에는 바퀴벌레가 돌아다니고
    야구 방망이를 든 약에 쩔은 녀석이 골목에 있군
    도망가려고 발악을 했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어
    견인차를 모는 녀석이 이미 내 차를 가져갔거든

    - 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 "The Message" (1982)



    ☞ 모든 것에 앞서, 본 챕터는 이 시리즈의 Chapter 3 "New Bloodz for Old Skool"을 읽고 오면 좋다. 꼭 참고하길. 

    ☞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는 힙합(Hip-Hop), 그리고 힙합 음악에 있어서의 MC(Master of Ceremony)라는 단어를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한 그룹이다. 이 그룹에는 걸출한 랩퍼 멜리 멜(Melle Mel)이 있었다. 올드 스쿨(Old School)에 속하는 랩들이 대부분 파티를 위한 것이었음에 반해, 멜리 멜은 ‘의식이 있는, 사회 고발적인 랩’을 했던 선구자로 기록된다. 힙합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멜리 멜은 그랜드마스터 멜리 멜(Grandmaster Melle Mel)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리드 랩퍼이자, 주요 곡의 창작자로, '랩을 하는 랩퍼'로서의 자신을 'MC(Master of Ceremony)'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같은 그룹의 키스 카우보이(Keith Cowboy)는 'Hip-Hop'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군대에 가는 친구를 행군 구령에 맞춰 '힙합! 힙합!'하고 놀린 것에서 파생되어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는 1979년, 인조이 레코즈(Enjoy Records)를 통해 첫 싱글 "Superrappin'"을 공개한다. 이후 슈거힐 레코즈(Sugar Hill Records)로 자리를 옮겨, "Freedom"과 "The Birthday Party" 등의 곡을 발표하고 이 곡들은 알앤비 차트에서 인기를 끈다. 1982년 이후, 멜리 멜은 좀 더 사회 참여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을 이끄는데, "Jesse", 'World War III"와 같은 곡에서 당시의 대통령인 레이건(Ronald Reagan)의 행정부가 추진한 경제 정책(레이거노믹스 Reaganomics)와 마약에 관한 정책이 흑인 공동체에 주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 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 - "The Message" 

    이러한 멜리 멜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표 트랙은 역시 ‘최초의 의식적이고 사회 고발적인 힙합 트랙’으로 평가 받는 "The Message"이다. 슈거힐 레코즈의 세션인 듀크 부티(Duke Bootee)의 연주 트랙 "The Jungle"을 인스트루멘탈로 사용해 랩을 얹은 이 곡은 한 달도 되지 않아 플래티넘을 달성했고, 힙합 역사에 길이 남을 곡이 된다. 그래미 명예의 전당(Grammy Hall of Fame)에 올라간 '최초의 힙합 녹음물'이며, 각종 매체의 힙합 역사를 다루는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곡이다.

    이후 멜리 멜은 '뉴욕에서의 고난과 싸워나가는 삶'을 노래한 "New York, New York", 또 이를 확장하여 삶에서의 고난을 이겨나가는 내용을 이야기한 "Survival (The Message 2)"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랜드마스터 플래시는 슈거힐 레코즈와의 분쟁으로 그룹을 탈퇴하게 되는데, 그들의 상징적인 곡 "The Message"의 로열티 분배가 문제였다. 그룹은 결국 분열하였고, 멜리 멜은 이때부터 그랜드마스터 멜리 멜(Grandmaster Melle Mel)로서 실질적으로 리더가 된다. 이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 아니, ‘멜리 멜과 아이들’은 약물에 반대하는 곡 "White Lines (Don't Don't Do It)"을 공개한다. 이어 멜리 멜은 영화 <Beat Street>에 참여하는 등 폭넓은 활약을 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간다. 



    Chaka Khan - “I Feel For You”


    멜리 멜의 업적과 활동은 꽤 방대해, 주목할 만한 사건 위주로 정리해 본다. 

    1. 그래미 상(Grammy Award)을 탄 최초의 랩 아티스트이다. 샤카 칸(Chaka Khan)의 무서운 히트곡 "I Feel For You"에 랩으로 참여해 곡을 한층 더 빛낸 것이다. 이 곡은 'Record of the Year'를 수상했고, 주류 알앤비 신에 힙합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후,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Back On The Block]과 [Q - The Autobiography of Quincy Jones]에 참여해 두 개의 그래미 상을 더 거머쥔다.

    2. 유명 TV쇼인 <Miami Vice>의 사운드트랙에 "Step Off", "Pump Me Up", "King Of The Streets", "Vice" 등의 곡을 올리며 힙합 음악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3. "Jesse"라는 곡을 발표해 사람들이 당시의 영향력 있는 흑인 공동체 지도자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제시 잭슨(Jesse Jackson)에게 투표하도록 권장했다.

    4. 더 킹 드림 코러스(The King Dream Chorus), 할리데이 크루(Holiday Crew)와 'King Holiday'에서 협연했다. 역시 흑인 공동체의 위대한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Dr. Martin Luther King Jr.)의 생일을 국경일로 선언하자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5.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에 반대하는 움직임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예술인(Artists United Against Apartheid)' 운동에 참여한다. "Sun City"는 이 운동의 대표곡이 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포기할 때까지 공연되었다고 한다.

    6. 2007년 1월 30일, 멜리 멜은 드디어 그의 첫 번째 솔로 앨범 [Muscles]을 공개한다. 최초의 싱글이고 뮤직 비디오가 공개된 곡이 바로 "M3 - The New Message".

    7. 2007년 3월 12일, 멜리 멜과 더 퓨리어스 파이브, 그리고 이 당시에 다시 합류한 그랜드마스터 플래시(DJ Grandmaster Flash)까지, 랩 그룹으로서는 처음으로 '록앤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올라간다. 멜리 멜은 연설에서 폭력의 문화가 아니라 힙합 본연의 문화성을 회복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 Grandmaster Melle Mel - "M3 - The New Message"

    이후 멜리 멜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다양하고, 힙합의 선구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행보를 이어갔으며, 이러한 활동들은 이후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N.W.A. 등의 사회적 가사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준다. 앞선 챕터에서도 설명했지만, 힙합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쿨 허크(Kool 'DJ' Herc)도 그러하고,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 그리고 이 멜리 멜도 '자신들이 선구자로서 일구어놓은 힙합 문화를 향한 애정'이 매우 크다. 그의 반가운 모습은 아이스-티(Ice-T)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Something from Nothing: The Art of Rap(2012)>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사랑과 평화.

    - Chapter 6 끝, To Be Continued -


    [오늘의 힙합 역사 한 토막]

    1974-80 디스코(Disco)라 불리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라디오 방송과 클럽 등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랩 대해부 What is Rap?」에서)

    ★ 출처 - 흑인음악 매거진 '힙합엘이' ( http://HiphopLE.com ) (무단으로 출처 삭제, 재배포 금지)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1:07
    • 부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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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에서 부기우기의 탄생까지(1)

    1920년대 Classic Female Blues와 Country Blues - 블루스의 어머니, 블루스의 여왕의 등장
    Robert Johnson에 의해서 그 형식이 완성된 Mississippi Delta Blues는 멤피스를 비롯한 중소 도시나 남부지역에서 유행 하였고 동시대에 시카고를 중심으로 대도시에서는 흑인 여성들의 보컬을 특징으로 한 Classic Female Blues가 전성기를 맞이한다.

    여성 블루스 보컬리스트 1호는 Mamie Smith이고,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Ma Rainey, 블루스의 여왕이라 추앙받던 Bessie Smith가 있다.
    대부분의 여성 블루스 주자들은 Vaudeville (민스트럴 쇼와 영국식 극장 쇼를 결합한 형태)이나 유랑극단의 텐트 쇼 등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었다. 주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간혹 대규모 밴드를 배경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주로  가난, 학대, 파경, 삶의 고뇌, 성적 표현 등 초기노동요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블루스의 여왕, Bessie Smith의 비극적인 죽음
    당시 이들은 선택받은 소수의 흑인이었지만 몇몇 여성 보컬리스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블루스 주자들은 거칠고 빈곤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당대의 블루스는 주로 시골이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흑인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여전히 백인들에게 블루스는 여전히 저속하고 상스러운 음악이었고 블루스 연주자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일례로 Bessie Smith의 1923년도 앨범이 80만장 정도 판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공연을 위해 미시시피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고, 백인들만 응급차에 구조되고 단지 흑인 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치료가 거부되어 끝내 출혈과다로 숨지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도 20년이 지난 후에 밝혀진다. 
    이처럼 백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던 블루스가 1930년대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기우기, 피아노 블루스의 출현이다.
    1930년대 부기우기의 출현 - 경제공황기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다
    부기우기(boogie woogie)는 1920년대 중후반 흑인 피아니스트들이 고안한 피아노 블루스의 특이한 주법으로, 베이스 리듬을 1마디에 8박으로 잡고, 반복하는 펼침 화음을 타고 오른손으로 자유로이 애드립하는 형태, 4/4박자인데 8박자로 들리는 빠른 템포의 음악으로 블루스 화성진행을 토대로 한 피아노의 반복적인 왼손 베이스가 특징인, 즉, 빠르고 흥겨운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외치는 듯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블루스의 한 장르이다.

    1930년대에 전축과 라디오의 일반적인 보급으로 재즈와 백인들의 팝이 중흥기를 맞이하며 블루스는 일시적인 침체기로 접어들 때 새로운 형식의 블루스가 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기우기이다. 부기우기는 1920년대 중반 주로 싸구려 술집(Honk-Tonk)에서 연주되던 컨트리 블루스의 일종이었는데 1920년대 말에 도시에 전파되고 음반으로도 제작되어 점차 일반인과 백인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경제공황기인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즈를 연주하는 빅밴드보다 저비용이라는 이점을 안고 널리 백인사회에도 유행하게 된다. 부기우기는 그 음악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침체된 사회분위기를 일신하며 1940년대까지 유행하며 이후 백인들의 대표음악으로 자리매김하는 로큰롤 (Rock-흔들다, Roll-구르다 1920년대 초반 컨트리블루스와 클래식 여성 블루스에서 널리 쓰이던 블루스 용어로서 로큰롤은 한 때 백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합성어였다.)에 널리 도입된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유무동의 Blues Time - 블루스 이야기④
    부기우기를 말하다(2)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부기우기, 록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다
    흔히 부기우기를 Barrelhouse Music이라고 한다. 즉 흑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던 통나무로 만든 싸구려 술집 음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부기우기의 등장은 블루스뿐 아니라 재즈, 당시의 대중음악에 크나큰 전환점을 마련한다. 부기우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마침내 빅밴드에서 부기우기와 점프 스타일의 블루스를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마침내 그 Jump Blues는 록큰롤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록큰롤(원래 섹스용어였음)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음악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블루스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록의 탄생’에 관여한 것이었다. 1950년대 후반, 록큰롤이 유행하면서 백인들이 블루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블루스 음악을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가공하면서 록음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블루스 리바이벌과 록음악의 탄생이 이뤄진 곳은 블루스의 발상지인 미국이 아닌 대서양 건너 영국 땅 이었다. Cyril Davies, Alexis Korner, John Mayall과 같은 백인 블루스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Rolling Stones, Beatles, Pretty Things같은 밴드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우상이 흑인 블루스맨들과 그들의 음악임을 밝혔고, “브리티시 리듬 앤 블루스”로 불리는 영국 특유의 블루스 음악이 록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당대에도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에서 성행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독일을 중심으로 중북부유럽에서 블루스 페스티발, 콘서트 등이 미주보다 자주 열리며 성행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영국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모여든 히피들이 포크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른바 Acid Rock이라는 음악과 Texas를 중심으로 태동한 Country Music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Janis Joplin이 등장하면서 포크에 국한 되어있던 히피들의 관심은 블루스 음악으로 확장되었고 B.B. King, Luther Allison, Buddy Guy같이 블루스맨들이 대중에게 평가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블루스는 재즈에 속한 장르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록큰롤의 탄생과 함께 블루스는 독자적인 기원과 형식 그리고 발전과정을 가진, 재즈와는 별개의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가장 오래된 대중음악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천대 받던 블루스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24년의 짧은 삶, 그러나 위대한 부기우기 연주자 Pinetop Smith
    부기우기 스타일을 완성한 것은 Clarence Pinetop Smith(1904~1929)라는 설과 Charlie Cow Cow Davenport(1894~1955)라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두 가지 설이 있다. 분명한 것은 부기우기가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Pinetop Smith라는 것이 지론이다. 후에 출현하는 Robert Johnson이 델타블루스 스타일을 완성하면서 블루스 전반에 공헌을 했다면 Pinetop Smith는 Piano Blues, Boogie Woogie라는 블루스 장르를 세상에 알리고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한 공로자이다.
    본명 Clarence Smith, 그는 1904년 6월 11일 Alabama Troy에서 태어나고 Birmingham에서 자랐다. 그의 닉네임 Pinetop은 어릴 적 그가 즐겨 올랐던 나무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1920년 그는 17살에 T.O.B.A.(Theater Owners Booking Association) Vaudeville에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싱어,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던 Ma Rainey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1928년에 녹음을 위해 시카고로 이주하는데 당대 가장 유명했던 피아노 연주자인 Albert Ammons, Meade Lux Lewis와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녹음을 준비한다. 드디어 동년 12월 29일 피아노 블루스의 역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곡을 녹음하는데 그 곡이 바로 Pine Top's Boogie Woogie이다. Smith는 이듬해 다른 녹음 스케줄을 준비하는 과정에 시카고의 작은 댄스홀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총상을 입고 24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부기우기 주자 Albert Ammons와 Pete Johnson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1938년 Tommy Dorsey와 그의 오케스트라가 그의 곡 Boogie Woogie를 다시 정리해 녹음한다. 이 앨범이 2차 세계대전 이후 400만장 이상 팔리며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고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아쉽게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여 그의 앨범 자켓이나 사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참여예정 뮤지션이 추천하는 블루스 명반

    성명  Rodrigo Eberienos   나이  34   국적 Brasil 
    직업 Professional Harmonica Player,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참여예정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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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5. 11:03

    Jump Blues

    글 유무동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사무국장 / 음악평론가




    점프 블루스, ‘Rock & Roll’을 탄생시키다
    점프 블루스란 도약을 나타내는 ‘점프’라는 타이틀을 가진 블루스인데, 말 그대로 활기찬 리듬이 두드러진 블루스이다. 


    1930년대 말 생겨난 이것은 


    기존의 블루스에 부기우기와 셔플리듬의 약동적이고 리드미컬한 요소가 첨가되어 활달하고 경쾌하다. 즉 스윙재즈, 부기우기, 블루스가 믹스되어 신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흡사 스윙재즈처럼 들리기도 한다. 당시 재즈의 스윙 영향을 받아 엔터테이너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고, 익살맞은 내용과 음악 분위기를 연출하는 댄스용 음악이기도 하다. 연주 시에는 색소폰과 같은 관악기와 혼 섹션이 첨가되어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블루스가 재즈에서 파생됐다고 오해를 받게 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점프 블루스는 40년대 중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초창기 R&B의 이전 단계라 할 수 있다. R&B로 이름이 바뀐 점프 블루스는 이후 인종에 관계없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게 되며, 백인들의 음악적 영감을 상당히 자극시키게 된다. 이 R&B는 많은 백인 뮤지션들이 커버하게 되고, 급기야 ‘Rock & Roll’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초창기의 R&B는 작금의 R&B와는 음악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초창기 백인 로큰 롤러들의 출신 지역이 블루스가 유행하던 내쉬빌 이남의 남부 지역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Rock & Roll’의 최초 주자는 재즈 뮤지션 Louis Jordan
    부기우기, 점프블루스가 ‘Rock & Roll’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과연 최초의 ‘Rock & Roll’은 누가 만들었을까? 
    Louis Jordan(1906-1975), 빅밴드에서 섹소폰 주자로 활동하던 재즈 뮤지션이었다.
    왜, 재즈뮤지션이 로큰롤의 최초 주자였을까? 그의 태생과 성장배경을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루이스는 아칸사스 브링클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남쪽에 재즈의 메카 뉴올리언스, 동쪽으로 델타블루스의 성지라 불리는 미시시피, 동북쪽으로는 컨트리 음악의 중심지 내슈빌, 서쪽은 텍사스, 더군다나 그의 부친은 음악가였다. 집안과 주변의 환경이 그에게 음악적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 것이다.

    30년대 초 뉴욕으로 진출, 36년 그 유명한 Ella Fitzgerald가 메인싱어로 있던 Savoy Ballroom 오케스트라에 가입한다. 그는 밴드에서 연주뿐 아니라 노래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 드디어 30년대 후반  자신의 밴드 Louis Jordan and Tympany Five를 결성하더니 40년대 초반 ‘You’re My Meat.’라는 곡을 발표하며 히트를 한다. 이어 1945년 발표한 ‘Caldonia’는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Caldonia’(B.B. King의 원곡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라는 곡이 최초의 Rock & Roll이다. 
    원래 재즈뮤지션이었으나 최초의 크로스오버 아티스트이며 로큰롤의 모든 요소를 만들었다.
    가장 큰 그의 공로는 당대 백인들에게 Race Music이라고 불리며 천대받던 블루스를  40년대 후반부터 리듬앤블루스(당대의 리듬앤블루스와 다름) 라고 불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50년대 중반까지 블루스를 리듬앤블루스라 불렀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블루스라는 음악에 인종차별적 요소는 거의 없어진다.

    Blues Festival For Peace In Korea 
    해외 조직위원이 추천하는 블루스 명반

    성명  Ken Koll       국적  미국       나이  58 
    직업  플로리다 항만 총감독, 블루스음반 수집가
    E-Mail  kkoll20@yahoo.com


    David Landon - I Like It Too Much (2012) 
    Mr. Landon is once again joined in the studio by his blues lover’s dream band featuring Steve Evans on bass (Ray Manzarek, Roy Rodgers), Randy Hayes on drums (Chris Cain, Coco Montoya) and Tony Stead on organ (Sly Stone, Tommy Castro). Special guests include Melvin Seals (Jerry Garcia Band), Steve Willis (Elvin Bishop) and Alvon Johnson, as well as a 4-piece horn section made up of the bay area’s best players.



    Jack Derwin - Covered All In Blue (2013)
     
    Australian contemporary musician, delivers a blend of his own blues/jazz/roots and acoustic compositions, plus standards with originality.


     

     

    Kevin Selfe - Long Walk Home (2013)
    Kevin Selfe is a man who has dedicated his life to the blues. For more than a decade, he has been sharing that love and dedication with audiences from coast to coast, building a loyal following wherever his energetic mix of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blues is heard.

     


    <셔플>  ~~~~~~~~~~~~~~~~~  <스트레이트 > 


                           반대 개념 



     

     

     

     

    - 셔플







     

     

     


    - 스트레이트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4. 23:08



    동해안 블루스


            A) 스타일. - 애팔래치아 산맥을 둘러싼 전 지역(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켄터키, (동)테네시, 조지아)에서는 매우 특이한 블루스가 발달했다. 이 블루스는 델타의 드라마틱하고 신랄한 블루스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었다. 비록 그 구조는 동일하지만, 델타의 엇박자 리듬이 여기서는 번갈아 이어지는 베이스음의 규칙적인 효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무사태평하고 느긋한 인상을 만들어냈고, 래그타임이라고 불리는 매우 특이한 기타 스타일을 창조한 대부분의 뮤지션들의 뛰어난 악기 솜씨에 의해 그러한 인상은 더욱더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기타 스타일의 먼 기원은 아마도 플로리다를 따라 이어지는 카리브 해의 섬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어쨌든 남부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이 지역에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는 덜 강했기에 흑인들에게는 보다 평온한 삶의 조건이 창출되었으며, 이는 음악에도 반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최초의 음반 녹음들에서부터 샘 맥 기(Sam Mac Gee)(Depot blues)와 같은 백인 뮤지션들의 스타일과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와 같은 흑인 뮤지션들의 스타일을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로 봐서 근거가 있다. 마찬가지로, 1925년부터 흑인 하모니카연주자인 드 포드 베일리(De Ford Bailey)는 내쉬빌에서부터 방송된 컨트리 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인 <그랜드 올드 오프리>(Grand Old Opry)의 스타였다. 이런 일은 델타 지역이나 텍사스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백인들과 흑인들에게 공통된 음악 레퍼토리를 발견한다고 놀랄 필요가 없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블루스와 래그타임의 코드에 기초를 두며, 자주 앵글로 색슨의 발라드 전통에서 자유롭게 끌어낸 이야기를 자주 노래하고, 중심 주제는 실패한 사랑이었다. 기타 솔로(그리고 때때로 하모니카, 바이올린, 만돌린 솔로)는 각 뮤지션이 자신의 솜씨를 증명할 기회였다.

            오늘날 동해안의 이 음악 전통의 여러 곡들은 미국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민속음악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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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a)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



    a) 블라인드 블레이크(Blind Blake, 1890-1935년경) 

    블라인드 블레이크는 1926년과 1932년 사이에 많은 음반을 녹음했으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래그타임 기타의 진정한 선구자이며, 그의 오른손 연주의 섬세함과 능란함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그토록 대중화된 이 기타 스타일의 많은 추종자들에게 아직도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블라인드 블레이크는 동해안의 백인음악과 흑인음악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했다. (곡들로는 Southern rag, No dough blues, Rope stranger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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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b) 블라인드 윌리 맥텔(Blind Willie McTell)



    b) 블라인드 윌리 맥텔(Blind Willie McTell, 1901-1959)

    (애틀랜타의 한 호텔방에서 녹음하는 맥텔. 당시에 존 로맥스John Lomax가 블루스맨들을 찾아다니며 녹음을 한 것은 유명하다) 

     

    블라인드 윌리 맥텔 또한 주목할만한 기타리스트로서 매우 어려운 12줄 기타의 전문가였다. 애틀랜타 주변에서 매우 유명했던 그는 맹인 뮤지션으로서 행인들의 요구에 따라 길이나 시장, 혹은 주차장 주위에서 노래하고 연주했다. 맥텔은 1927년에서 1956년 사이에 많은 음반을 녹음했으며, 맑고 높은 목소리, 악기 연주 솜씨, 그리고 폭넓은 레퍼토리는 그로 하여금 블루스 역사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게 해주었다. (곡들: Love changin' blues, Savannah blues, Southern can is mine, Stateboro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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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c) 레버런드 게리 데이비스(Reverend Gary Davis, 1896-1972)




    c) 레버런드 게리 데이비스(Reverend Gary Davis, 1896-1972)

     

     

    우선 블라인드 블레이크의 영향을 받았던 게리 데이비스는 자신의 시력을 앗아간 사고 이후 종교로 전향했다. 그래서 뉴욕 거리의 설교자가 된 그는 기타연주에 종교적 노래들을 적용함으로써, 60년대의 <포크> 기타리스트 세대(스테판 그로스만Stefan Grossman, 데이브 반 론크Dave Van Ronk) 전체에 대단한 영향을 준 멜로디 스타일을 완성했다.

    (크로스로드 콘서트에서 에릭 클랩튼과 함께한 스테판 그로스만, 그의 기타교재는 여러권 있다)

    (얼클루와 스테판 그로스만)

    (데이브 반 론크)

     

    비록 게리 데이비스는 블루스 역사에서 다소 부차적 인물로 나타나지만, 낭독조의 노래와 악기연주 솜씨를 통해 그의 작품은 진정으로 뛰어난 독창적 작품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많은 음반 녹음을 하기도 했다.(곡들: Death don't have mercy, Motherless children, Lord, I'll be always with you)

    (Durham, North Carolina: 게리 데이비스가 이주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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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d) 블라인드 보이 풀러(Blind Boy Fuller, 1903-1940)



    d) 블라인드 보이 풀러(Blind Boy Fuller, 1903-1940)

     

    블라인드 보이 풀러는 비록 앞에 언급된 세 사람, 블라인드 블레이크, 블라인드 윌리 맥텔, 레버런드 게리 데이비스보다 기타 솜씨가 훨씬 떨어졌지만, 동해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흑인 뮤지션이었다. 때때로 그는 동해안 스타일의 진정한 창시자로 간주되는데, 이는 블레이크와 데이비스로부터 영감을 받고, 베이스를 과장되게 연주함으로써 이들을 단순화한 그의 기타 연주와 유머로 가득한 것이 많은 그의 독창적인 레퍼토리(Step it up and go, 1000 women, Truckin' little women)가 1940년 이후에 동해안 지역의 거의 모든 블루스맨들에게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영향은 끊임없이 담배 재배 지역(버지니아, 캐롤라이나)의 모든 도시들을 두루 돌아다닌 그의 큰 기동성과 제작자인 제이 비 롱(J. B. Long)의 상업 감각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겠다.

    (버지니아의 담배밭)

     

    여러 뮤지션들이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이후에 블라인드 보이 풀러의 명성을 계속 이어갔고, 브라우니 맥 기(Brownie Mac Ghee) 같은 이는 얼마 동안 그의 이름을 쓰기까지 했다.

    (블라인드 보이 풀러의 추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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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e) 조쉬 화이트(Josh White, 1908-1969)



    e) 조쉬 화이트(Josh White, 1908-1969)

     

    (1935년의 조쉬 화이트)

    조쉬 화이트 역시 래그타임 기타의 위대한 명인이


    었다. 비록 코드들을 끊어서 한 음 한 음을 교차로


     하여 멜로디 라인을 연주하는 그의 스타일에 절충


    적인 로니 존슨의 영향이 보이기는 해도 말이다.

     

    (1945년)

    1945년 이후에 뉴욕의 <포크>계에 동화되고 이때


    부터 점점 더 작위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의 성


    향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1932년과 1936년 사이에 


    녹음된 그의 음반들(Ball and chain, Delia, Jim Crow 


    train, Silicosis blues)의 탁월성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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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안 블루스의 주요 창시자들. f) 소니 테리(Sonny Terry, 1911-1986)

    f) 소니 테리(Sonny Terry, 1911-1986)

     

    (브라우니 맥 기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가 있는 소니 테리는 매


    우 허스키하고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의 가수이


    며, 여기에 애팔래치아 지역의 전통에 깊은 뿌리를


     둔 하모니카 명인의 스타일이 더해졌다. 그의 하


    모니카 스타일은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중간 단


    계이다. 소니 테리는 처음에는 게리 데이비스와 블


    라인드 보이 풀러의 반주를 해주다가, 자연스럽게


     브라우니 맥 기와 함께했다.

     

    그는 브라우니 맥 기와 함께 블루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 지속된 듀오들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냈


    다. 맥 기와 함께 테리가 녹음한 몇몇 곡들(Train


     blues, Whoopin' the blues, Pick a bale of cotton)은


     잊을 수 없는 곡들이며, 미국과 특히 유럽의 많은


     하모니카 연주자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ll


    ㅣㅣㅣ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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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그타임 

    Ragtime

    래그타임 Rag time

    Rag란 ‘일그러졌다’ 라는 뜻이며, Time이란 악보의 한 마디를 뜻하는 것이다.

    즉, 리듬이 엉망이라는 뜻으로 래그타임을 쉽게 이야기한다.

    단순히 래그라고도 한다. 재즈를 낳은 여러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미시시피와 미주리 강 유역에서 활동한 홍키 통크(Honkytonk : 


    원래 싸구려 술지브 연예장을 뜻하는 흑인 속어이며 그곳에서 연주하던 소박하고 


    즉흥적인 음악양식을 말함)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순회극단 쇼의 노래, 흑인 밴조(기타와 비슷한 미국의 재즈 및 민속악기) 음악, 


    케이크워크(CakeWalk : 19세기말 미국에서 발생해서 유럽에까지 유행한 사교춤)의 


    당김음 리듬,            유럽 음악 요소 등의 영향을 받았다.  

     

     

                                             Classic Banjo

    래그타임은 형식적 구성감이 있는 피아노 곡을 통해 특유의 표현을 이루었고, 


    왼손으로는 4/4박자나 2/4박지와 같이 규칙적 리듬을 치는 한편, 오른손으로는 


    빠르고 힘찬 당김음 선율로 앞으로 나가려는 추진력을 표했다. 


    곡은 유럽의 오락 음악인 마치, 폴카, 카드리유 따위 형식의 것이 많고, 


    즉흥연주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00년경부터는 흑인 및 백인의 밴드 연주도 이것을 도입하고, 


    뉴올리안즈의 마칭 밴드에도 들어 있어서 재즈의 한 원류가 되었다. 


    Jazz도 초기에는 래그타임이라 불린 적이 있다. 양장의 커다란 차이는, 


    래그타임이 작곡된 악보대로 연주했던 것에 대해 재즈는 암보로 자기류로 


    분해(分解)해서 연주하고, 나중에는 즉흥연주에 의한 독주를 중시하게 된 점이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스캇 조플린(Scott Joplin 1868-1917, 


    미국 텍사스‘래그타임의 왕’)과 젤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이다. 


    예로써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스팅의 주제가 ‘The Entertaner’를 들을 수 있다. 


    1899년 초기 래그타임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인 <The Maple Leaf Rag>를 발표했다. 


    그는 래그타임을 고전음악의 영원하고도 진지한 한갈래로 간주했으며 


    이 양식으로 수백 곡의 소품, 연습곡,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밖에 중요한 연주가 중 


    세인트루이스에서 활동한 인물로 루이스 쇼빈, 


    토머스 M. 터핀(세인트루이스 래그타임의 아버지)을 들 수 있고, 뉴올리언스에서 


    활동한 인물로 토니 잭슨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테리 월도의 <이것이 래그타임 This is Ragtime>(1976)은 


    초창기의 래그타임과 20세기 후반 래그타임의 부활을 다 같이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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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드몬트 블루스 


    피드몬트 블루스(Piedmont Blues, 아파라치안 산맥 기슭에서 백인 포크, 컨트리와 혼합된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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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4. 21:43

    What is Early Music?

    by Todd M.McComb

     

    이 자료는 Early Music FAQ의 허락하에 실은 것입니다.

    Loaded under the permission of Early Music FAQ. 

      

     "고음악"이라는 용어는 때로 혼동을 일으킨다. 매우 일반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의미에서 본다면 1400년의 음악은 고음악이다. 반면 1940년 이후의 음악은 고음악이 아니다. 또한 고음악의 정황은 유럽의 클래식 음악 안에 있는데, 유럽의 클래식 음악은 1700년과 1800년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작곡되었다. 따라서 고음악(Early Music)에서"early"라는 말은 그것보다 더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고음악은 서양음악에서 주로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시기를 가리킨다. 고음악(Early Music)은 상업잡지에서나 저널에서나 레코드상점의 클래식 코너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반화된 용어이다.

     

     Musical Periods

    정확한 날짜에 근거하여 서양음악의 양식적 기간을 정의 내리는 것과 고음악(Early Music)이 내포하는 기간을 요약한다는 것은 상당히 혼동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바로크기간이 끝나는 시기는 바흐가 죽은 연도인 1750년이라고 본다. 주로 고음악의 규정에서 사용하기에 이 연도는 편리하며 수용되어질 만하다. 그러나 이 연도는 또한  그 시기의 여러 양식적인 사건들을  단순화 시켜놓은 것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특정 요소를 가진 양식으로서 바로크를 조명한다고 할 때 그러한 특색은 이 시기 이전의 몇 작곡자들에 의한 "고전파"양식을 가졌던 이들의 견지에서 뒤집어져 왔으며 그 시기 이후의 다른 작곡자들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특색은 나타난다. 양식적인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특정요소에 우위를 부여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훗날 고안된 것이다.

     

    바로크 음악은 몬테베르디와 다른 작곡자들에게서 보여지는 레치타티보의 대두, 형식으로서의 오페라의 시작, 바소콘티누오의 결과적인 채택 등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사실, 1600년경 르네상스 양식의 끝은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명백한 구분 중 하나인데, 이러한 변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몬테베르디와 다른 음악가들이 지지한 자의식의 길이라는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은 덜 분명하다. 고려될 만한 두 가지의 중대한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안정된 화성으로서 3도의 사용과 예배시의 음악의 가사에 나타난 새로운 인문주의적인 성향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중요한 변화들이 수십 년에 걸쳐 발생했기 때문에 비록 대부분의 문헌들이 르네상스의 시작을 1420년경 듀파이의 신新하모니 시기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1500년경 죠스깽의 인문주의적인 가사에 그 출발을 두기도 한다. 따라서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후자(죠스깽)를 가리켜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유럽의 클래식 구분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를 고음악이라는 라벨하에 포함시키고 바로크 시기는 분리하여 취급한다.

     

    ◇ 고대의 음악

    분명히  음악과 그 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멀리 떨어진 지금에서 과거를 되돌아 봄에 따라 감소하는 성향이 있다. 그 이유는 오리지날 자료들이 감소하기 때문이고 문헌들도 파괴될 여지가 많으며 또한 우리와 그 시대 사람들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처럼 글의 명제과 개론들을 잘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우리가 이 나중 문제는 연구하고 더욱 익숙해짐으로서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앞의 두 가지의 문제점은 어쩔 수 없는 장벽이다. 중세음악으로 이르는 음악의 시작을 기술한다고 할 때 정확한 일자를 부여하기에 지식이라는 것은 너무나 막연하다. 1100년에 이르러 비교적 많은 양의 음표표기된 폴리포니와 비전례 라틴노래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특히나 "12세기 르네상스"를 둘러싼 일반적인 역사적 요소들로 인하여 중세 음악의 "시작"을 이 시점에서 두려고 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는 바로 인접해 있는 12세기 이전 레파토리의 정황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그 레파토리들 조차도 그 시작점이 불분명하다.

     

    아마도 문서화된1100년보다 수세기 전에 즉흥적인 형태로서 발생했음 직한 폴리포니(다성음악)의 시작은 서양음악사에서 중심을 이루는 사건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중세 음악 자료는 실제로 플래인챈트(평성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그것은 넓은 지역에서 상응하여 연구되고 연주되었으며 다양한 지방색과 역사적인 스타일들을 가지고 있다. 반(半)신화적인 요소가 섞인 그레고리안 챈트도 있었는가 하면 더 이른 시기의 많은 성가 레파토리가 남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광범위하게 볼 때 고음악이라고 취급되어질 만한 여러 고대 음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료로 남아있다. 시대가 워낙 멀어졌기 때문에 이 음악은 일반적 의미의 "고음악" 레파토리와 어느 정도 구별되는 성향이 있으며 따라서 종종 독자적으로 취급되어지기도 한다. 특히나 서유럽자체에서는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고대 음악과 몇 세기 지난 후의 서유럽의 가장 이른 플레인챈트 사이에서의 식별되어질 만한 양식적 연속성이 없는 분명한 중단점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Revival

     

    고음악이라는 것이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기를 의미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왜 하필 특별히 그 시기들인가? 그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18세기 후반의 모짜르트와 하이든의 음악을 시작으로 몇 작품들은 계속 대중 앞에서 연주되었다. 모짜르트나 하이든의 음악 그리고 다음 세대인 베토벤의 음악들은 그들의 살아 생전 대중 콘서트에서 연주되었고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비교적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더 이전의 음악들은 작곡된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연주되지 못한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 성향에 여러 예외들이 있는데 특히나 바티칸이나 왕궁 장례식에서 사용된 의식음악들에서 그러하다. 더 넓게 이야기하자면 평성가와 곡조들도 대개 더욱 유별나고 특징적인 예외이다. 비록 다양한 학적인 명맥이나 전문화된 연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고음악(early music)은 이러한 대중적인 연속성을 대개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른(Early)것이다.

     

    복잡한 면을 제외하더라도 어원상으로 볼 때도 고음악은 연주자가 고음악을 연주해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콘서트에서 전형적으로 연주되는 가장 이른 음악보다도 더욱 이른(ealier) 음악이다. 대부분 이런 현상은 1900년에 발생하여 점차로 초반과 중반의 수십년을 거쳐오게 되었다. 르네상스 음악을 보다 더 큰 규모로 재현시킨 첫 단체들을 든다면 그들은 영국 성당 합창단들(English Cathedral Choirs) 이다. 이제 그들은 이런 음악을 오랫동안 연주해 왔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있다. 그들의 이 레퍼토리 초기 입문은 1800년에 영국에서 있었던, 심지어는 1700년대에도 있었던 여러 미숙한 음악학적인 재현노력으로 인하여 용이해졌고 20세기의 영국작곡가들 사이에서 르네상스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더욱 부상되었다. 1950년에 이르러 고음악은 사포드 케이프, 알프레드 델러, 노아 그린버그 등과 같은 연주자들과 더불어 명확한 현상이 되었다. 그 이래로 고음악 연주자들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청중들의 관심 또한 늘어났고 고음악의 판매고가 다른 클래식 음악과 비교해도 엇비슷한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아카데미에서 비교적 이어져 내려온 방법에서 이러한 시기(고음악시기)의 본보기를 가지고 음악을 학습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거나 또한 많은 저명한 작곡자들이 고작 한 번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연류 되어 있었던 역사적인 테크닉의 단계를 뛰어넘어 '고음악 운동'을 규정지은 결정적인 것보다 앞선 주목할 만한 몇 재현들이 있었다. 비록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가들에게서 행해진 헨델의메시야 의 재현도 주목할 만 하지만 멘델스죤이 1829년에 바흐의 마태수난곡 을 재현한 것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하겠다. 특히나 이런 사건들은 영국에서 최초의 고음악계의 요건을 이루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몇 작곡자들의 작품은 현재의 고음악 재현보다 앞선 시기의 연주 전통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작곡자들의 실제 살아 생전에는 계속 연주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런 다양한 연주의 명맥들은 특히나 고음악 운동 자체가 역사와 양식적인 영역에서 모두 그 범위가 넓어지게 됨에 따라 흥미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 여러 다른 연주 스타일의 줄기를 낳게 한 영국에서의 음악 재현사의 경우에 매우 그러하다.

     

    ◇ 재창조

    재현에 관한 개념은 고음악 운동에 시금석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몇 연주 스타일이 더 발전되고 그들 자신의 연속성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조금은 철학적인 복잡성을 제시한다. 고음악 연주자들은 자필 원고로 된 자료를 직접 대해 왔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해석은 다른 연주가들이 했던 방식에 크게 그 기본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료자체에 대해 느끼는 그들 자신만의 직접적인 안목에 더욱 비중을 둔다. 이것은 "주류"의 연주자들이 했던 방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며 따라서 이 주류의 연주자들은 지속된 연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전 연주자의 개념에서 발전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고음악 공동체 자체 내에 있는 연주연속성의 실존은 연주자들의 목표에 분기점 같은 것을 제공하며 이런 점에서 고음악은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 되어온 것이다.

     

    이미 정규적으로 연주되어지고 있는 18세기 음악보다 겨우 수십 년 더 옛날의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하는 사고는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선 연주자들이 해석했던 방식 보다는 직접 원래의 오리지널 자료를 가지고서 기초해석을 하려고 하는 바램은 의미심장한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가령 작곡자 자신의 맥락에서 뒤떨어져서 전 연주를 모방하고 변경한다고 하는 것은 수십년의 경과 후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직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술이다. 연대기적으로 고음악을 취급하는 이런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필요성은 연주역사에 기본을 둔 해석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져왔는데 특히나 바흐 작품같은 것들을 초기에 재현했던 연주역사의 경우에 그러했다. 개념이 의미하는 철학적인 논쟁의 큰 몸집과 더불어 "작곡자의 의도"라고 하는 것이 슬로건이 되었고 작곡당시의 소리의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것이 일반적 성향이 되어왔다. 이러한 행동은 필연적으로 연주자로 하여금 재창조되는 정황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했으며 원문의 자료와 근본적으로 중개되어진다.

     

     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

     

    슈만과 멘델스존에 의해 바흐의 음악이 재현되었을 때,  그 음악은 19세기의 형식으로 연주되고 심지어는 편곡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성도 추가되었고, 피아노 파트가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에 첨가되었다. 그 당시의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발굴하였고" 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음악을 자신들의 스타일에 맞춰서 연주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관심이 높아져가면서, 더불어 호기심도 증가함에 따라, 특히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 내는 것의 난해함을 언급하다보니, “원전 악기”에 대한 개념이 이 레퍼토리에 떠오르게 되었다. 바흐의 음악은 피아노로 연주할 때와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후자의 경우 또한 프레이징, 장식음, 다이나믹, 또는 기교 등에서 다른 방법들을 요구했다. 초기 음악이 새롭게 고쳐질 필요 없이 그 음악이 속했던 옛 시대의 음향방식으로서 더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급진적이었고, ‘고음악 운동’을 위한 또 다른 근본적인 원동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전 악기”라는 용어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에 의해 점차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악기의 재현이라던가 남아있는 표본들에 대해 사용할 때 진짜 본래의 "오리지널"의 의미는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가 하는 점과,“악기”라는 말은 정격 성악 기법들에 대해서는 왜곡된 분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정격연주”라든가 “작곡자의 의도”라는 제목들도 또한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으나 이 때는 실제적인 이유에서라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철학적인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결정 밑바탕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한 작품이 그것도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 원래 어떻게 연주되었는지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작곡가들은 몇 백년 후의 가상적인 연주를 배려하여 그들의 ‘의도’를 말해 놓지는 않았다. 작곡가들이 그들의 음악이 최초로 연주되었을 때와 똑같이 후세에도 연주되기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은 다분히 철학적인 것이다.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어떤 사람은 슈만이나 멘델스존이 그들의 음악이 새로운 스타일의 시대에 맞춰 새로워지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심지어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 수도 있다고 결론을 지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과 꼭 맞도록 실제적으로 연주를 얻어내기엔 어려움이 많은 작곡가였던 베토벤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 이슈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작곡가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을 생각과 정확하게 수행해 내려는 수고를 두 배로 들여야 하는 요구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연주에 대한 생각들을,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종의 번역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방법 등과 같은 식으로 발전 시켜야 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그 의도란 정확히 무엇인가? 바흐 생전에는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었던 b 단조 미사곡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마도 죽고 나서 10년 후에라도 그것이 계속 들려질 것이라고는 기대치 못했을 훨씬 더 이전의 음악가들의 음악의 경우엔 어떠한가?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사실이 있다 : 하나의 음악작품이 만들어졌던 당시를 둘러싼 여러 환경들에 대해 좀 더 많이 배우게 된다면 그 음악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발성법과 악기들의 음향과 자료들을 통해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에 대한 고찰을 얻을 수 있다. 역사적인 조율법을 통해 화성의 진행에 대해 깊이 알 수 있다. 특히 중세나 초기 르네상스와 같이 우리 시대와 굉장히 멀리 떨어진 시대의 경우, 오늘날의 전형적인 실제(practice)에 기초하여 나왔을 음악이 그 시대에 어떻게 연주되었을 것인가에 대한 어떤 “상식” 적인 생각들은 역사적인 논문에 설명된 바와는 사뭇 다르다. 궁극적으로 한 연주자가 오늘날 연주할 대상과 그 방법을 결정하고, 현대의 악기들이나 기타 여러 요소들이 결국 선택되어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정보에 근거를 둔 결정(informed decision)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이것이 “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또는 HIP)” 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게 하였다.

     

    ◇ 정격성(Authenticity)

    고음악 자체의 고유한 시기의 연주 환경은 오늘날과는 굉장히 달랐다. 예를 들어 중세 음악을 콘서트 홀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이미 본질적으로 이율배반 적이다. 연주가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역사적 자료들에 따라 음악을 연구하고 또 해석해 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들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historical performance”라는 단순한 개념은 일단 지금 현대의 생각이고,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작품들을 연주하려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풀릴 수 없는 철학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인 함정이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 시대 스타일의 악기들이나 성악 테크닉를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고풍스러운 의상과 오래된 건물 안의 역사적인 시대상황 안으로 음악을 옮겨 놓는 것까지, 모든 방향으로 그 정황을 확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설정들은 흔하지는 않지만 그 시대의 청중들을 되살려 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또한 웃긴 일이 될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음악이 대상으로 하는 청중들은 완전히 바뀐 새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격 연주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적어도 전통적인 연주와 경쟁하는 레퍼토리들와 관련되어 질문을 받았을 때, 감정적인 질문이 된다. “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라는 이름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적절히 중립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이 단어는 얼마나 정보를 알고 있는(informed) 사람이 존재하는지 또 어떻게 그 정보가(information)이 사용되는가에 대해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좀 더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그 시대에 대한 운동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다양한 실제적인 질문거리 들이 원문과 작곡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인 것들에 더해져서 발생한다. 바흐의 음악을 피아노보다는 하프시코드 위에서 연주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진보였으나, “원전 악기”라는 용어의 퇴색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하프시코드인가에 대한 정확성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가설적으로는, 물리적인 공연의 모든 뉘앙스는 마치 꼭 바흐를 위한 것인 양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 정보를 높이 평가하고, 정보를 가능한 많이 또한 최대한 충실히 사용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은 다만 연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의 연주도 음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슈로 돌아가서, 가설적으로 오리지널 연주를 완벽하게 재생한 음악일지라도 이론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어느 정도의 정확성으로, 비교적 고음악에 있어서 이 정확성의 정도라는 것은 전혀 완벽하지 못하지만, 표기법과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이 모든 자세한 정보를 지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프레이징, 뉘앙스, 각각의 음표에 대한 가장 미묘한 변화들.. 이러한 것들은 악보상에는 나와 있지 않다. 연주자들은 특히 그들 자신의 능력이나 의도를 반영하여 이러한 결정들을 해야 한다. 성악가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기교가 같다 하더라도 목소리가 똑같이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레코딩이라는 것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만 하는 살아 있는 예술로 음악을 만들어 주는 부분인 것이다. 그 이상으로, 특히 우리가 수백 년 후에 듣기를 원하는 음악 작품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창조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약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이 고음악을 연주함에 있어서 어떠한 창조성도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정격 음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그 음악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고체계를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사고체계라는 것은 오늘날 실로 불가능하다. 작품들이 결코 다시 새로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옛 작품은 새로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음악을 재현하는 일을 성공적이고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이다.

     

    Motivation

     

    연주의 역사는 "진보"와"진화"와 같은 사상을 빈번히 반영했고 결과적으로 악보와 해석이 현시대의 관심사들과 가능성들을 반영할 수 있도록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고 하는 함축된 의미를 반영했다. 작품에는 표준적인 평가가 있어왔다. 그러나,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작품이 계속 연주된다고 하는 사실은 고전음악계가 최근의 작품이라고 해서 단순히 더 낫다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식의 자기 모순 또한 계속 있어왔다. 서양 음악사를 통틀어서 그 시대의 새로운 음악이 그 전 세대의 것보다 자명하게 우수하다는 주장이 있어 왔으나 이러한 주장들은 베토벤 시대 이후 점점 비주류적인 생각이 되어 갔다. 고음악 운동이 다음 세대의 가장 깊은 뿌리를 추적해 나가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가 아니다. 더 오랜 음악이 현재 쓰여진 것보다 나쁘지 않고 더 훌륭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일단 생겨나자 훨씬 더 오래된 음악과 연주프랙티스들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다. 연주역사들은 비록 그것이 원래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있다 할지라도 현시대의 사상과 실현성을 지속하여 반영한다. 오늘날 음악사적 박물관에 바램이 커지는 것은 사회의 여러 요인들을 반영하는데 그 중 어느 정도는 시대적 지리적으로 다른 곳의 예술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문화다양성에 대한 자각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또한 우리 시대의 불안한 심리학적 사실들을 반영할 수도 있으나이러한 논의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뛰어 넘어서, 음악 양식과 예술성의 역사적인 변화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음악의 실존성(what music must be) 에 대한 우리 사고를 자연스럽게 확장 시킨다. 이것은 고음악이 우리 시대의 작곡에 총체적으로 주는 점이며, 또 고음악이 21세기의 대중의 의식을 견고하게 파고드는 것과 같이 굉장히 창조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Conclusion

     

    따라서 고음악은 연대기적으로 옛날인("1750년 이전")음악이거나 혹은 어느 음악에나 적용되어 질 수 있는 연주에 대한 태도("Historical Informed Performance"에서처럼)를 지칭한다. 주로 양쪽 모두의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음악의 실제연주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정확하게 해석되고, 실제에선 어떻게 그려지는 가에 대해서 사뭇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있다. 질문의 여지는 남아있으며 따라서 토론은 언제나 우리 포럼에서 흥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고음악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완전히 정의 내릴 수 없으며, 살아있는 예술로 존속할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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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클 - 고음악 답변 

    고음악


    질문하신 분께서 '고음악'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고음악 부흥 운동'이라든가 '고음악 연주'와 같은 말을 할 때 쓰이는 '고음악'이라는 용어는 바로크 음악을 포함하여 그 이전 시대의 음악을 가리킵니다. 즉, '고음악'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가리키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전고전파나 초기 고전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 해당하는 영어를 찾으시는 게 맞다면, 답은 'early music'입니다. 독일어의 'alte Musik'도 같은 의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음악'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연주 관습을 적용하여 연주해야만 하는 모든 시대의 음악을 가리킬 때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관점으로 바라 보느냐에 따라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음악까지도 '고음악'이라는 말이 지창하는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극단적으로는 옛 악기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이고 심지어 19세기 피아노로 연주하는 쇼팽이나 슈만, 또는 그 이후의 음악까지도 고음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고음악'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로만 이해하기보다는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과 음악을 바라 보는 관점까지 함께 생각하여 이해해야 하는데, 'early music'이라는 말의 의미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약 '고음악'이라는 말을 바로크 음악을 포함하지 않고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음악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고 계시다면 'early music'이라는 말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질문하신 글에서 바로크 음악을 따로 말씀하신 것을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구요. 바로크 시대보다 더 초기의 음악은 '중세 음악(medieval music 또는 music from the Middle Ages)'이나 '르네상스 음악(Renaissance music)'이라고 구분해서 말하면 되겠죠. 한편, 'ancient music'은 '고음악'이라기보다는 '고대음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고, 이 말은 통상적으로 중세보다도 더 초기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주로 그 이후의 음악을 가리키는 'early music'과는 다릅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과거에는 '고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고 현재에도 그런 용법으로 쓰이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The Accademy of Ancient Music"과 같은 연주단체 이름에서 'ancient'는 'early'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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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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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人心ㅇ
    :
    카테고리 없음 2014. 6. 14. 21:24



    dutch jazz는 다양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아방가르드 , 유로피안 프리재즈가  

     

     최근 몇년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이외에도   trad jazz와 smooth jazz  <후자의 예로는 candy dulfer가 있다> 와 



     네덜란드의 집시재즈의 선구자  Stochelo Rosenberg 등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Dutch_jazz





    posted by 人心ㅇ
    :